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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北 역사인식 "을사조약은 무효..日 역사의 심판 받을 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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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北 역사인식 "을사조약은 무효..日 역사의 심판 받을 것"

김민섭 [Dr. rafael] 2013. 11. 17. 10:00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08년을 맞아 일본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문은 이날 '일제의 과거 죄악을 반드시 결산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을사조약'은 "국제법상의 요구와 원칙을 난폭하게 유린한 불법무효한 조약"이라며 이 같이 밝혔다.

신문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과거 죄악에 대한 역사적 책임도 회피하려는 철면피하고 파렴치한 일본 반동들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일제에 대한 증오와 울분으로 가슴 끓이고 있는 우리 인민은 그 대가를 반드시 백 배, 천 배로 받아내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일본은 "구조약의 합법성을 운운하면서 그것을 과거청산을 거부하는 근거로 들고나오고 있다"라며 "역사 교과서에까지 일본은 을사5조약에 의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접수했다고 왜곡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이어 일본이 "우리의 신성한 땅인 독도를 저들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며 일제의 성노예 범죄 행위를 본인들의 '자원적 요구'나 '의사'에 의한 것이였다고 줴쳐대고 있다"라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례화, 합법화, 의무화하고 있다"라고 거듭 지적했다.


 

 


 

 

'을사조약?' 굴레로 강압 당한 '을사늑약?', 11월 17일 잊으면 안되는 이유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기사입력 2013/11/16 [08:48]

 

을사(乙巳,1905)년에 국가간에 문서로 합의했다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인가? 을사년에 강압에 의해 약정을 당했다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인가?

조약(條約)은 가지 조(條) 맺을 약(約)이다. 뜻은 '조목(條目)을 세워서 약정(約定)한 언약(言約) '이라고 풀이한다. 늑약(勒約), 굴레 늑(勒) 맺을 약(約)이다. 뜻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다. 조약에 빗대어 풀어보면 '굴레가 씌워져 약정한 언약'이다.

협륵(脅勒)이라는 단어가 있다. 협박(脅迫)하여 우겨댄다는 뜻이다. 이처럼 늑(勒)이라고 하는 한자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압당할 때 사용하는 글자다.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한일간의 약정은 '조약'인가 '늑약'인가?

이제 108년 전의 그 당시로 돌아가 보자.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흐트러짐 없이 잘 따라서)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해 고종을 위협하고, 협약 체결을 강요하고, 일본군을 동원해 궁 인근을 포위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고종 황제가 조약 체결을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는 등 대신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대신들을 끌어들인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7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어전회의를 열게 한다.

고종은 의견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어전회의에서 장시간 결론이 나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 안으로 들어가 위협을 가한다.

참정대신(국무총리)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거부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찬성한다. 이들 5명을 ‘을사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 원문]

 


을사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5.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을사늑약의 현장에서 체결을 반대했던 3인중 참정대신 한규설은 일본군에 감금당하였다가 풀려난 후 을사5적을 해임하려다가 자신이 해임 당했다. 1910년 경술국치(소위 '한일합병')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도 이를 거부하고 월남 이상재 선생을 돕는 등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민영기와 이하영은 후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왕은 고종에게 '이토 히루부미의 말을 잘 따라서 조치하라'는 친서 형식을 빌린 명령서를 보내고, 그것을 들고 온 '이토'는 군대를 끌고 들어와서 공포 분위기 속에 대신들의 손을 빌려 어보(임금의 도장)를 찍게 했다. 이게 어떻게 조약인가? 늑약이 맞다.

고종황제는 강제 조약에 서명을 했는가? 안했다.


'파란 눈의 한국인,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헐버트 선교사(Homer B. Hulbert)는 고종의 특명을 받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열강의 협력을 얻고자 갖은 고초를 감수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이 강제퇴위를 당하자, 헐버트는 미국으로 건너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일본 침략의 잔혹성과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여론에 폭로하며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이무렵 고종의 퇴위소식을 전해 받은 미국 언론들이 헐버트의 활동에 관심을 보여, 뉴욕타임즈와 뉴욕헤럴드가 헐버트의 주장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특히 뉴욕헤럴드는 '한국의 옥새는 강탈당했으며, 황제는 결코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헐버트의 주장을 빠짐없이 게재했다.

고종은 취재차 한국에 온 영국의 일간 트리뷴(Tribune)지의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에게 6개항의 밀서를 내려 1906년 2월 8일자 트리뷴지에 보도됐다. 밀서는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재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의 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고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을사늑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한 고종의 친서는 ▲1906년 1월 작성해 5월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사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전국에서 불길같은 반대 운동과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고종이 비밀리에 의병의 궐기를 독려하는 밀지를 내리기도 했다. 특히, 민영환은 뜻을 같이하는 대신들을 규합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에게 해산당한 후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의거 자결했다.

민영환의 유서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한편, 헐버트 선교사의 조선에 대한 애정과 조선 독립을 위한 노력은 을사늑약 이전에 발간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그 이후에 발간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조선제국멸망사'의 서문을 이렇게 적었다.


"비방(誹謗)이 극에 이르고 정의가 차츰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헐버트는 또한, 같은 책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한민족의 특성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이상과 실용이 알맞게 조화된 합리적 이상주의자. 둘째 적응성이 뛰어난 민족. 성냥이 부싯돌보다 편리함을 깨닫고 거의 전 국민이 순식간에 성냥을 쓰기 시작한 것이 사례다. 셋째 의로운 일에 과감히 돈을 쓸 줄 아는 인정 많은 민족. 넷째 굶어죽을지언정 구걸을 하지 않는 강한 자존심을 지녔다. 다섯째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망설이지 않아 진실성이 의심된다. 여섯째 파벌 싸움의 폐해가 심각하다.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는 거꾸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구별이 이처럼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역사편찬위원회는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을 진행하면서 2005년부터 교과서에 사용되기 시작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일본 국왕'은 '천황'으로 바꿔서 기술하도록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민주당 김태년 의원에 의해 공개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9일 김태년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주)좋은책신사고의 저자는 국사편찬위의 수정요구에 대해 “을사조약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하는 바람에 명칭조차 써넣지 못했음. 그후 을사년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뜻으로 을사조약으로 불려왔을 뿐임. 따라서 그 강제성과 불법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을사‘늑약’으로 표기해야 타당하다고 판단됨.”이라는 소신을 밝혔으나, 결국 ‘을사조약’으로 수정했다."고 전했다.

또한, "(주)교학사는 일본 역사를 설명하면서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부’라는 대목을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로 수정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였다. 국사편찬위는 '개념을 정확히 할 것'을 이유로 들었다."는 내용도 전했다.

 

[역사채널e.E06] 일제강점 36년의 시작 

 

 

EBS 국사편찬위원회 .. 한일병합 당시 작성된 조약문을 통해 한일병합늑약의 무효성을 밝힘 (순종황제의 마지막 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