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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서 배우는.. 손빈과 방연 전략과 전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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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서 배우는.. 손빈과 방연 전략과 전술

김민섭 [Dr. rafael] 2010. 11. 26. 23:20

귀곡자의 제자 손빈과 방연, 그리고 소진과 장의의 대조적인 관계

 

소진과 장의는 합종연횡을 모색하지만 손빈과 방연은 처음부터 대립

 

방연은 손빈을 무력화시키고 머리 속 지혜만을 빼앗으려 하지만...

 

 

 

 

벼슬 초기, 방연의 모함으로 빈형을 당하고 병법서까지 완성해 받치라는 지시에 고뇌하는 손빈 모습

 

 

 

 전국시대의 손빈과 방연 

손빈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나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진시황)나라로 이어지는 연대기를 개략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주周왕조가 낙양洛陽으로 천도(기원전 770년)하여 제후국과 같은 상황으로 전락하자 100여개의 소국들이 난립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 하며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가 시작된 최초의 해(기원전 722년)이기도하다. 이 소국들이 난립, 경쟁하다가 합병되면서 제·초·연·진·한·위·조의 7개국이 경쟁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기원전 453년),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기원전 403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으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221년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손자병법, 손빈병법의 저자 손빈

손빈은 기원전 380~320년 사람으로 바로 7개국이 각축을 벌이던 전국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는 자신의 이로움을 찾아 나라를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7개국 역시 자국이득에 따라 동맹을 맺거나 파기하는 일이 일상적인 시대였다.

손빈과 방연은 젊은 시절에 손자병법의 저자(?)인 귀곡자에게서 병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손빈과 방연, 소진과 장의의 스승

방연이 위나라 장군이 되어 위 혜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을 무렵 방연은 스스로 손빈의 재능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어 사신을 파견하여 손빈을 유인한 다음 모함에 빠지게 해 결국 무릎 뼈를 제거당하는 빈형을 받게 된다. 구차한 삶을 이어가던 도중 제나라 사신이 손빈의 재능을 발견하고그를 몰래 제나라로 데리고 간다. 제나라 장군 '전기'는 손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후하게 대하고, 제나라 위왕에게 천거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위, 조, 한, 제나라

 

손빈의 전투 전략과 전술, 그리고 방연의 몰락

해설1) 위(魏) 혜왕이 방연(8만 군사)에게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마릉 전투는 시작된다. 방연은 한단을 공격하기 전 1차로 위(衛)를 공격한다. 제(齊) 위왕은  전기(8만 군사)에게 조나라 한단을 지원 하라 명령한다.

손빈은 2차로 위(魏) 평릉을 공격해 들어가 방연으로 하여금 1차 오판을 유도한다. 무모함을 보여주면서 거짓 공격[의병계]를 감행한다. 평릉은 교통 요충지이므로 강병을 포진시킨 다음[위 군대 협공] 지략이 없는 지방장관을 출전시켜 포위 공격을 당하게 하여 제성과 고당이라는 지휘관을 사망케 한다.

방연은 3차로 평릉을 포위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손빈은 4차로 위나라 수도 '대량'을 습격하여 2차 오판을 유도한다. 방연이 '대량'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기동력 있는 전차 부대를 배치한다.

 당시 최강국 위나라 대장군 -> 승상, 방연

방연은 5차로 '대량'으로 회군하고, 손빈은 6차로 방연의 군대 뒤를 따르며 군세가 약한 것으로 보이게 하여 3차 오판을 유도한다. 손빈이 7차로 주력부대를 이끌고 계릉에 도착한다.

계릉 전투는 신속한 기동력, 예상치 못한 의표 찌름, 적 공격을 기다림, 적이 사활을 걸고 지키는 지역을 공격, 지원 주력부대 섬멸, 기습(기계) 공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전투 결과 방연은 어떻게 되었는가? '손빈 병법'에는 방연을 포로로 사로 잡았다라고 되어 있으며, '사기, 위세가'에는 마릉 전투(13년 후)에서 방연이 살해당하고, 태자 신은 포로가 되었다라고 한다. '사기, 손오열전'에는 방연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해설2) 위(魏) 혜왕이 조나라 공격을 명령하자 방연은 1차로 한나라 '신정'을 공격했다. 제(齊) 위왕은 장군 '전기'에게 한나라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손빈은 방연이 대량으로 올 것으로 예상하고 2차로 위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한다.

방연은 3차로 대량으로 회군하고, 손빈은  4차로 전투를 회피하면서 적을 교만하게 만들고[피이교지(避而驕之)] 적을 유인하여 공격한다[유이취지(誘而取之)]. 적을 유인할 때 사용한 방법은 퇴각하면서 주둔할 때 아궁이 수를 자꾸 감소시켜 적으로 하여금 병력이 감소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퇴각 1일(10만 병사 분), 2일(5만 병사 분), 3일(3만 병사 분)마다 아궁이 수를 줄여 나갔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있는데, 병력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다른 전투에서 사용된 방법이지만 횟불 수를 증가시키는 것, 허수아비를 늘어 세워 놓은 것 등이다.

방연은 아궁이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자 기세가 등등하여 5차로 보병부대와 군량을 남기고 빠른 수레와 기병만으로 추격에 나선다.

마릉 전투에서 방연은 어떻게 되었는가? 마릉은 길이 좁고 지세가 험하며, 양쪽에 나무가 울창한 산이 있다. 손빈은 길 양 옆에 군사 1만을 매복시켜 놓고 나무를 베어 길을 막은 다음 큰 나무 한그루 남겨 껍질을 벗겨낸 자리에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으리라'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방연이 밤에 나무를 치우게 하고, 불빛을 비추어 나무 글씨를 보는 순간 공격을 받았다.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어 손빈 부대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자살했다고 한다.                 

마릉 전투는 지원을 요청하는 한나라를 종속시키기 위해 2차 지원 요청시 파병하고, 위나라 군사들의 품성(교만, 조급함, 제나라 군대 경멸)을 이용하여 한나라와 조나라 모두를 취한 전투라 할 수 있다(KDN 자주국방네트워크 글에서).

2010.11.25 최초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