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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나의 자화상일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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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나의 자화상일까?

김민섭 [Dr. rafael] 2010. 3. 24. 21:00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22

 

또 하나의 슬픈 자화상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 

 

" 살아계신 아버지 모습이랑 너무나 닮았다"

 

 - 고흐가  나의 자화상이 아니길 바라면서 오늘도 정진을 한다 -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빈센트 빌럼 판 호흐[*],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조울증으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사후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미친 반 고흐의 영향은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을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제지사업자 료에이 사이토(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료에이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1]

 

목차

[편집]

[편집] 어린 시절 (1853~1869)

1866년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에 있는 브레다와 인접한 쥔더르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개신교(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목사인 테오도뤼스 반 고흐이며, 어머니는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1819~1906)이다. 고흐는 이 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2]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라고 지어 주었다. 또, 반 고흐는 그의 할아버지인 빈센트 반 고흐(1789~1874)와 이름을 같이했다. 할아버지 역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다. 그리고 반 고흐가 태어난 지 4년 후, 그의 아버지의 아름을 딴 동생 테오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빌헤미나(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르넬리스(Cornelius)가 태어났다.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였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1860년에 그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준데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32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1866년 9월 15일부터 1868년 3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3]

[편집] 청년 시절 (1869~1878)

1876년의 반 고흐

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켄트 주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년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편집] 보리나주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그의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편집] 1881년~

1881년에 그는 그의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 예술을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 예술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 예술을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4]즉, 고흐의 그림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편집] 가십

그는 자신의 작품성에 대해 스스로 불만을 표현하여 스스로의 귀를 잘라버렸다. 먼 훗날 1996년에 스페인에서는 이 사건의 명칭을 딴 가수 라 오레하데 반 고흐가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편집] 대표작품과 화보

[편집] 주석

  1. 《현대문명진단》1권,'그림 한 점에 580억원!,p.94-95,이원복 글, 그림, 조선일보사 출판국
  2. Biography of Vincent Van Gogh
  3.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 Nuenen, c. 1883년 12월 18일
  4. 정신병이 낳은 불후의 명작들-KBS뉴스 2008년 4월 3일 보도, 이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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