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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두 나라의 국민성 비교(외국인의 시각) vs For Asian EU in the future 본문

On the way to paradise/파라다이스 세곕니다

韓中 두 나라의 국민성 비교(외국인의 시각) vs For Asian EU in the future

김민섭 [Dr. rafael] 2011. 11. 17. 23:55

 

 

노인과 소년

중국인은 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으며 뜨거울수록 더욱 좋아한다.
한 주전자를 반나절이면 다 마셔버린다.
그러나 한국인은 차를 마시는 습관이 없으며 그들은 차가운
물을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한겨울에도 차가운 물을 꿀꺽꿀꺽 단숨에 마셔버린다.

중국은 과거에 아주 번성했던 적이 있으며
역시 완전히 몰락했던 적도 여러 번 있다.
나라가 아주 태평했던 적도 있었으며
흉악한 폭력과 혼란, 재난에 시달렸던 적도 있었다.
긴 역사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본 것 많고 겪은 일 많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중국은 너무 늙었다.
모든 활기는 사라졌으며 민첩함도 닳아 없어졌고
모든 일에 대해서 열정이 없다. 무슨 일을 하던지 천천히 느긋하게 이다.

그러나 한국은 마치 많은 일을 경험하지 못한
소년같이 아직 세파에 의해 절벽 끝까지 밀려나보지 못했으며
여전히 기운 넘치고 민첩하다.

 


위험이 닥쳤을 때, 노인과 소년의 반응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1840중국이 막 정신 차리려 하던 그 순간
조선은 아직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중국에서 양무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조선인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합병이 되고 나서야 한국인은 사납게 일어났다.

한국인은 소년과 같이 강력한 자존심으로 이 자극을 받아들었고
처음 경험해보는 수치에 마치 불 과 같이 매 순간 순간 자신을 불태웠다.
급한 성격 역시 그들에게 현대화의 길을 빠르게 걸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과 급한 성격을 한국인들은
다행히 어떤 “주의”에 대한 다툼에 소모하지 않고,
그 힘을 경제 발전이라는 이 길에 쏟아 부었다.

한국인의 고집스러움과 억척같음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 표출되어 나온다.
그들은 현대화 과정에서 몇 천 년에 걸쳐 길러진 습성을 강한 의지로 극복해 냈고,
“오래된 것은 어제와 같이 죽고, 이 후부터는 새롭게 태어난다.”라는
결심으로 자신의 오래된 생활습관을 바꿔나갔다. 한다고 하면 해냈고,
번개와 같이 맹렬하고 바람과 같이 신속했다.

1961년, 박정희가 정변을 일으키고, 아주 빠르게 정권을 잡아갔으며
강력한 통치로 해방이후 십여년간 지속되어 온
정치적 나약함과 사회적 혼란을 잡아나갔다.
박정희는 한국정부에 일종의 강력한 군인 정신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갱생”의 정책을 내놓고, 부패하고 낡은 정부에 대대적인 청소를 하고
많은 수의 젊은 군인들이 정권을 잡게 하였다.
그 후 십년간 그는 여러 번 반부패 운동을 벌였고,
정치인들이 커피를 마시거나 춤을 추거나 일본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시켰다.
전제정치라는 방법으로 의지 강하고 청교도 정신적인 관리군대 건설하였다.

기타 후진 국가들에서는 부대 정권들이 사회 발달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제국주의적이고 권위적인 전통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온 나라를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군인 단체와 같이 만든 것이다.

한국인의 복종 정신, 질서 정신, 단체정신, 계급 의식이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에 커다란 작용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회사들은 하나같이 군사화조직 같이
직원들에게는 머리를 단정하고 짧게 자르게끔 하고
모든 회색의 작업복을 입게 하고 왼쪽 가슴에는
이름을 달게 할 뿐만 아니라,

또 “공업전사, 일하면서 싸운다” “수출전쟁” “100억 달러 달성” 과 같은
군인적인 구호들을 외쳤다. 기업가들은 직원들의 사상을 통일하여
마치 부모를 섬기듯 회사에 충성하게 하여
나쁜 작업환경과 조건, 저임금을 참아내고 저녁까지 잔업에 매달리게 하였다.

이러한 한국인의 성격과 근면함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촉매제가 되었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게으른 민족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인은 완전 다른 모습으로 세계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국의 발전 속도는 세계 제일이며, 이것은 홍콩, 도쿄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7,80년대 한국인들은 자원해서 잔업 했고 잔업수당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겨우 몇 십만에 한국은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나라가 세계11번째 경제 대국이 된 것이다.

한국인의 진지함과 집중력, 빈틈없음은
그들이 서방 국가들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대충대충 넘어가게 하지 않았고,
만일 한다고만 하면 무조건 제일 좋은 것만 만들어 내게 하였다.
십 여 년 전만해도 여전히 많은 경제 전문가들을
한국의 자동차가 미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을 비웃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백만 대를 넘어섰으며
대우자동차는 매년 45만대를 미국에 수출한다.

한국의 핸드폰도 시작은 무척 늦었지만,
짧은 몇 년의 시간 만에 삼성 핸드폰은
세계 핸드폰 시장에서 점유률이 가장 높다.

경제발전으로 얻은 것은 다만 물질적인 풍요에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결속이라는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박정희는 절대 권력의 방법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부수어 나갔으며
모든 정치제도에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과거 사회 활력을 억눌렀던 관료기구를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현재형 관리 기구로 변화시켰다.
“관료중심주의” “탁상공론” “정신”에만 매달리던 사회 분위기를 과학을 중시하고
이성과 개성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바꿔 나간 것이다.

교육의 보편화에 따라 한국인의 참정의식과 능력도 발전되어 나갔다.
그들은 한국인 특유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얻어냈으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비록 인구는 중국보다 적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흘린 피는 중국의 몇 배에 이른다.

학생운동과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비록 자신보다
힘이 몇 배는 강한 군인과 경찰, 최류탄과 가스에 부딪쳐도
사람들은 절대 후퇴하지 않고 맹렬하게 싸워나갔다.
민중의 희생과 일부 개명된 정치적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은 다행히 순조롭게 권위중심 정치에서 민주정치로 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진보는 한국인의 정신을 여러 번 변화시켰다.
60년대 이전에만 해도 가장 가난하던 나라 중 하나였으며
세계인들에게 무시당하던 민족이었던 한국이다.
梁启超이 (조선의 멸망 원인)이라는 책에서 말하길 조선의 멸망 원인은
바로 민족성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인은 빈말 하기를 좋아하고,
집안싸움이 중국보다 더 심각하고, 얼굴이 두껍고,
성격이 음험하고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민족이었다고 했다.

한국인 스스로도 이 민족적 결점을 인정했었다.
박정희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솔직하게 한국인의 단점에 대해 얘기 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혁명의 최종 목표는 우리 선조가 물려준
좋지 못한 유산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증오하고 낭비하며, 혼잡하고 게으르며
진실하지 못한 점이다.” 라고 선포했다.

지금, 우리는 박정희의 목표가 대부분 달성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은 현재 세계이서 단결, 민족주의, 근면함과 강인함, 청결함과 , 진실함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화장실


최근 몇 년, 한국을 여행하는 중국인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들 중 화장실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이들도 점점 많아진다.
한국을 방문한 여행자들 중 대부분은 한국의 “화장실”에 대해 얘기를 한다.

2000년 한 명의 여행가가 여행일지 중에 쓰길:
서울의 공공시설은 완벽하며, 가장 감격스러운 것은 화장실이다.
호텔의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작은 식당의 화장실도 무척 깨끗했다.
나는 유료 화장실을 본적이 없으며 모든 화장실은 화장지와 물과 거울을
기본적으로 제공하며 큰 건물의 화장실의 경우는 장애인용 화장실까지 겸비해 놓고 있다.
정말 주도면밀하다. 우리의 공중화장실과 비교해 보면 정말 두렵기 까지 하다.
그들은 “화장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의 여자들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화장실 문화의 한중의 차이는 확실했다.
한국에 갔던 많은 사람들이 이로써 얻는 결론은
“한국인은 청결함을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한국인은 깨끗함을 아주 중시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화장실을 통해서 민족성도 자연히 높아지는 것이다.

백년 전까지만 해도 한중일 삼국의 농촌 화장실은 같은 수준이었다.
모두 땅에 구멍하나를 파서 위에 나무판자 하나만 깔면 되는 것이었다.

백년 후, 일본인이 새로운 변기를 개발했고,
후에 그것이 발전되어 자동으로 물이 나와서
사람의 뒤고 물로 씻어주고 말려주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일본인의 화장실은 정말 귀방과 같이 안에 향수를 뿌리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전람관처럼 각종 꽃과 장식품을 달아 놓는다.

한국은 20세기 60년대 말부터 화장실에 수도설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몇십년의 발전을 통해 이미 일본 화장실의 위생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거기다 한국인은 독특한 기지를 발휘하여 “변소”의 이름을 “화장실”로 바꾸어
중국사람들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농촌도 개혁의 바름을 타고 대부분의 화장실이 모두
현대화가 되었고 아주 소수의 변두리 지방만이 아직까지 제례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북경, 상해 등 대도시의 호화로운 건물의 화장실은
한국과 일본보다 더욱 화려하지만,
그 나머지의 거대한 농총은 대부분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며, 조금의 변화도 없다.
화장실은 중국인의 열등감 중 하나인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외국인이 중국에 와서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큰 도시, 고궁의 화려함과 다른 하나는 바로 화장실의 더러움일 것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의 화장실에 대해 글을 썼는데
그것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해당 글은 한류열풍사랑에서 발췌

 


2011.11.17. 최초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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