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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시대, 반무인정권 항쟁을 주도했던 김보당, 문하시중 김심언계가 나의 선조 ..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전주김씨(김태서계)로 알려져 본문

Welcome to green life/ + 네!! 저는..요?

무신정권시대, 반무인정권 항쟁을 주도했던 김보당, 문하시중 김심언계가 나의 선조 ..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전주김씨(김태서계)로 알려져

김민섭 [Dr. rafael] 2017. 5. 18. 08:58

 

 

 

 

나는 신라 경순왕(경주 김씨) 후손으로 고려 김심언 할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영광 김씨 33대 손입니다.

그렇다고 전남 영광의 영광파 계열은 아니고 서울 경(京) 경파 계열의 경기화성 서해안의 남양/우정

석천/장안이 고향이지요. 현재 현대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이 들어서 있는 곳

 

고려시대 최대 문벌로서 조선시대까지 그 영화를 유지해온 반면, 그 숫자는 극히 적어 순수 혈통을 자랑하며 종친 모두가 가까운 집안임을 잊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전국 어디에서 만나건 형제의 정을 가지고 서로 우애합시다(까페글 스크랩).

 

영광김씨의 시조인 김심언(?∼1018)은 묘지명에 “其先□.....下侍中諱審言, 高祖妃森溪郡夫人崔氏”로 되어 있다. 비록 궐자가 있지만 문하시중 김심언의 내용이며, 부인인 삼계군부인 최씨는 常侍 崔暹의 딸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에 과거제가 도입된 후 최초의 급제자였던 최섬에게 배웠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 때에 급제 出仕하면서 영광김씨가 중앙 개경에 본격 정착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종∼현종 때에 크게 활약하였으며 典故와 文翰職을 역임하였다.

 

 990년(성종 9) 가을7월에 우보궐이었던 김심언이 유향(劉向)의 육정(六正), 육사(六邪)의 설과 한나라 자사(刺史) 육조(六條) 의 정(政)으로써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알리고. 관청의 벽에 써서 권계(勸戒)로 삼기를 청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 봉사는 海東孔子로 추앙된 崔沖이 덕종 초년에 내외의 관청 벽에 다시 써 붙이게 하여 관리들의 귀감을 삼게 할 정도로 후대까지 국가의 지침이 되었다.

 

 1001년(목종 4)에 주목(州牧)이 되매 농사에 힘써 백성을 구휼(救恤)하니 심히 당시의 칭찬을 받았고 이어 지공거를 역임하였다. 현종 즉위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발탁(拔擢) 되어 예부상서로 옮기었고, 현종 5년 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옮겨 나가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되었다. 그의 淸德重望은 의ㆍ명종 때까지도 널리 칭송되었다.

 

현종 9년(1018년) 졸하니 삼일간 철조(輟朝) 하고 문안 (文安)이라 익(謚)하였다.

 

그런데 영광 김씨 순수 혈통이 적은 이유는 뭘까?  그건 다음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영광김씨 가문과 김보당....

시조 김 심언 에서 7대조 김 보당에 이르기까지..

 

2006년 6월 14일 본래 북한에 있던 김극검의 묘지 금석문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손환일, 허흥식 교수가 발굴 공개한 내용으로 그간 김심언-김윤보-김행경으로 대를 이은 것으로 역사가들과 영광김씨대동보에서는 알려져 있었으나 이 비석문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김심언-김화성-김행경으로 고쳐야 할 것으로 밝혀짐.

 

영광김씨 대동보   : 김심언-김윤보-김행경-김수녕-김극검-김영부-김보당

예전 학설            : 김심언-김행경-김수녕-김극검-김영부-김보당 

손환일 허흥식교수: 김심언-김화성-김행경-김수녕-김극검-김영부-김보당

  

영광김씨가문과 김보당


 

[이 글은 영광지역문화연구소에 게재되기에 앞서

 

"영광김씨가문의 발전과 가계" 및  "맺음말"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임]


본고는 이미 발표된 논고를 중심으로 2006년도에 북한에서 반출되었다가 입수된

<김극검묘지명>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논고 내용과 크게 중복되고,

묘지명 전문을 소개하지 못한 한계가 크다.

 

이 묘지명 전문과 연구는 곧 발표되리라 생각되지만

미리 원문을 보내주신 허흥식교수께 새삼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영광김씨가문의 세계(世系)와 행적은 대부분 밝혀져 있으나

이 묘지명을 토대로 2대조가 김화성(金化成)임을 처음으로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어느 면에서 김윤보가 실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묘지명에 명기(明記)된 것처럼 김화성이 김심언의 장자임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김윤보는 새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여전히 미확인의 인물로 남겨두어야할 듯 하다.


그런데 고려사회에서 차지하는 영광김씨 가문의 지위는

김심언 이래의 학문에 그 연원을 두는 것이었다.

시조 김심언의 봉사 2조는 그 자신의 유학적 정치이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이자

구심적인 관료지위를 짐작케 한다.

이를 이어 학사 김행경의 문명(文名)과 함께

김극검은 인종 때에 폄직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반이자겸의 정치성향이 뚜렷하여 재보에 오르는 등

가문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아들인 김영부는 의종 때에 비판적 충의로운 자세를 견지하여

무인정변 때 무인들한테 화를 입지 않고,

오히려 아들 김보당 등이 중용되고,

이들의 거주지가 ‘평장동(平章洞)으로 불리는 문벌귀족가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영광김씨가문은 1173년 김보당의 항쟁으로 탄압을 받아

모든 내외손이 화를 피해 은둔한 결과

세계(世系)조차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참고) 고려 김보당과 조위총의 반무신 항쟁


고려 무신 정중부의 난이 발생한 지 3년 후인 명종 3년(1173)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에 의해 반무신란의 성격을 띤 거병이 있었다.

김보당은 전통 있는 문벌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처음에는 무신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종대 이래로 문란해진 정치 질서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소신과 기대가

무신 정권하에서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반무신의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동북면 병마사의 직에 오름을 기회로 정중부, 이의방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외치며 기병하였고,

거제도에 유폐된 전왕을 경주로 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안북 도호부에서 붙들려 개경으로 이송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의종도 이의민에게 살해 되어 거병은 3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 뒤, 얼마 안 된 명종 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역시 정중부, 이의방 등의 토벌을 목표로 거병하였다.

이 거사는 김보당의 난과는 달리, 민란의 성격을 띤 것이기는 하나,

무인 정부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거사도 결국 무신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신집권기의 반무신란의 성격 -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9 : 변태섭 한국사연구회, 1978

 

 

그후 무신정권은 11차례의 몽고침략(1231~1270)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하여 유지되나

고려 전역은 쑥대밭이 되어 민생은 더욱 피폐해지게 되며, 마침내 몽고에 패퇴하여

왕권이 회복되게 된다.

 

참고로 고려 무신정권 (武臣政權, 1170~1270)

무인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되어 100년 동안 무신들의 암투와 살육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로,

정중부(1106~1179), 경대승(1154~1183), 이의민(?~1196), 최충헌(1149~1219)-최우(?~1249)-

최항(?~1257)-최의(?~1258), 김준(김인준. 1258~1268), 임연(?~1270)-임유무(?~1270)로 이어졌다.
  

이처럼 영광김씨의 몰락은 멸문(滅門)의 화로 표현될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이 가문이 한동안 몰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적 정치이념에 뿌리 깊은 문벌가문이었으며,

왕권을 찬탈한 무인정권을 전면에서 거부한 항쟁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한국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김보당의 항쟁은 영광김씨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역사에서 논의되는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록 영광김씨가 김보당 항쟁의 실패에 따라 멸문의 상황에 이르렀으나

외척 이자겸의 발호를 반대하고,

의종과 같은 국왕의 전천(專擅)을 비판하며,

무인정권을 거부하는 등의 자취는

한국역사의 거대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그 본령(本領)이 되었음을

귀감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김보당은 멸문의 화를 가져온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김씨가문의 명예를 지킴과 동시에

유학적 정치이념에 따라 무인정권에 맞서 항쟁을 벌인

한국 역사상의 인물로 부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번에 <김극검묘지명>이 입수되어

김보당의 선대에 있어서는 2대조를 비롯하여

가계(家系) 전승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북한 개성에 소재한

영광김씨가문의 유무형적 자산(資産)들이 잘 보존 계승되고,

당장의 통일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문중 차원에서의 남북교류도 병행되어

문중의 뿌리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영광김씨가문의 발전과 가계 (총정리)


영광김씨가문의 계보는 <김영부묘지명>에 근거하지만 2대조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번에 발굴 공개된 <김극검묘지명>은 비록 몇몇 궐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대조 확인과 함께 일부 행적을 보완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묘지명의 내용에 따라 기존의 논고 내용을 보완하여

영광김씨의 가계와 행적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광김씨의 시조인 김심언(?∼1018)은 묘지명에

“其先□.....下侍中諱審言, 高祖妃森溪郡夫人崔氏”로 되어있다.

비록 궐자가 있지만 문하시중 김심언의 내용이며,

부인인 삼계군부인 최씨는 常侍 崔暹의 딸로 확인된다.

그는 고려에 과거제가 도입된 후 최초의 급제자였던 최섬에게 배웠으며,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전반적인 행적이 밝혀져 있는 것처럼 그는 성종 때에 급제 出仕하면서

영광김씨가 중앙 개경에 본격 정착한 계기가 되었으며,

주로 典故와 文翰職을 역임하면서 성종∼현종 때에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정치관과 지위는 우보궐겸기거주에 있을 때인

990년(성종 9)에 ≪說苑≫의 '六正六邪文'과 ≪漢書≫의 '刺史六條政'을 인용하여 올린

封事 2條에서 잘 나타난다.

이 봉사는 海東孔子로 추앙된 崔沖이 덕종 초년에 내외의 관청 벽에 다시

써 붙이게 하여 관리들의 귀감을 삼게 할 정도로 후대까지 국가의 지침이 되었다.

역시 그는 1001년(목종 4)에 지공거를 역임한 후 현종 때에

평장사에 오른 재상이었으며, 그의 淸德重望은 의ㆍ명종 때까지도 널리 칭송되었다. 


2대조는 묘지명에 상의봉어에 추봉된 金化成으로,

부인은 양원군부인으로 되어있다.

물론 ≪영광김씨대동보≫에는 3대조 김행경이 누락되고

김심언 - 김윤보 - 김극검으로 되어 있으며,

≪영광군지≫에는 극검이 심언의 손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후대의 자료인 ≪영광김씨대동보≫ 등에 착오가 있으며,

김윤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김영부묘지명>과 ≪고려사≫(권97) 김극검전에는 김심언의 손자가 김행경이며,

김극검이 김행경의 손자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필자가 김윤보를 미확인의 인물로 남겨둔데 비하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영광김씨가문에서는 2대조로 모시고 있으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극검묘지명>에 김화성이 2대조로 확인되므로

김심언 - 김윤보의 가계 전승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김윤보가 김화성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김화성의 동생일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김화성이 김심언의 장자일 것임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특히 윤보의 이름이 아무런 근거 없이 나올 리는 없겠으나

≪대동보≫에 3대조 김행경이 누락된 것 등으로 보아

아마 가계 전승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탄압 받았던

김보당항쟁의 영향으로 보아야할 듯 하다.


3대조 김행경에 대해서는 “…章事諱行瓊, 祖妃陽原郡夫人李氏”로 되어있다.

그는 이미 밝혀진 행적처럼 1061년(문종 15)에 한림학사가 되고,

1063년에 지공거를 역임한 후 1087년(선종 4)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문물이 번성한 문종 때에

李靖恭ㆍ李令[靈]幹ㆍ盧旦[坦]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학사 문인이었다.


4대조 김수녕은 尙食奉御에 추증되고, 妹婿는 檢校軍器監에 추봉된 鄭僅이다.

그에 대해 <김극검묘지명>에는

考諱守寧, 有疾不仕. 公以宰輔, 追封將仕郎殿中內給□…郡大夫人”로 되어있다.

이를 통해 그가 질병이 있었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아들 김극검이 재보에 올라 장사랑 전중내급[사]에 추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인도 궐자가 있어 ‘…郡大夫人’만을 알 수 있으나

영광김씨의 지위로 보아 유력한 문벌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대조 김극검(?∼1139) 祖蔭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여러 중외관을 역임하면서

1236년(인종 14) 참지정사에 올라 이듬해에 물러난 재상이며,

부인은 시상서예부원외랑 金台凱의 딸이다.

이와 함께 이 번에 발굴된 그 자신의 <묘지명>에 의해

보다 구체적인 행적이 확인된다.

역시 <묘지명>에도 그의 시호가 祁烈이고,

부인은 漢南郡夫人金氏로서 都官員外郎 金台凱의 딸임이 재확인된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처음 典獄暑丞을 시작으로

안동부사ㆍ상의봉어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123년(인종 1) 鄭克永의 유배와 동시에 殷州防禦守로 貶守되었다가

1126년(인종 4)에 무죄임이 밝혀져 尙書刑部郎中兼三司判官에 올랐다.

 

(그는 그 자신의 묘지명에 “癸卯(1123, 인종 1)十二月日, 貶守殷州防禦守.

 

有巨室檀權枉竄, 翰林學士鄭克永, 于南□□....貶之.


그 후 역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1137년(인종 15)에 守司空 參知政事 太子少師 柱國으로 致仕했으며,

궐자가 1139년(己未)으로 확인되는 11월 27일에 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6대조 金永夫(?∼1172)는 인종 때에 급제하고,

인ㆍ의종 때에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164년(의종 18)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하였다.

그의 행적과 정치성향은 이미 밝혀져 있으나

부인이 俠溪裵氏의 좌사낭중 裵寬의 딸임을 비롯하여

그 자신의 묘지명이 있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동안 영광김씨의 2대조를 제외한 김보당까지의 계보 파악도

이 묘지명에 따른 것이다. 


7대조 김보당은 의종대의 관계 기사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金至當이

1162년(의종 16) 內侍 閤門祗候(侯)(정 7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도 이에 준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1170년에 무인정권이 들어서자 우간의에 발탁되었고,

1172년(명종2)에는상서병부시랑ㆍ東宮侍誦[講]學士ㆍ知制誥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1173년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반무인정권 항쟁을 전개했다가

피살되었다.


이처럼 영광김씨는 시조 김심언을 시작으로 김화성 - 김행경 - 김수녕 - 김극검 -

김영부 - 김보당, 김지당으로 복원된다.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은 통혼관계, ②는 활동 시기, ③은 蔭仕ㆍ科擧 及第 여부, ④는 최종 官位)

金審言ꠏꠏꠏꠏꠏꠏꠏꠏ金化成ꠏꠏꠏꠏꠏꠏꠏꠏ金行瓊--

① 常侍 崔暹의 女       ① 陽原郡夫人         陽原郡夫人 李氏

② 성종∼현종            ④ 尙衣奉御(封)    ② 문종∼선종

③ 科擧 及第 및 知貢擧                             ③ 知貢擧

④ 內史侍郞平章事                                   ④ 門下侍郞平章事

 


金守寧ꠏꠏꠏꠏꠏꠏꠏꠏ 金克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④ 將仕郎殿中內給事   ① 試尙書禮部員外郞 金允凱의 女

  女:鄭 僅                    ② 숙종∼인종 

  ③ 檢校軍器監            ③ 蔭仕

                                 ④ 參知政事


金永夫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金甫當

  ① 左司郎中 裵寬의 女(俠溪人.)     ② 의종∼명종

  ② 인종∼명종                             ④ 左諫議大夫

  ③ 科擧 及第, 知貢擧.                 金至當

  ④ 中書侍郞平章事                       ① 海州 崔允儀의 女

                                                  ② 의종∼명종

                                  ③ 尙書禮部郎中

                                                女:崔孝諒

                                                    李世延(改嫁)

                                                     ① 慶源 李之茂의 子

                                                     ④ 試尙書刑部侍郞閤門事

                                                女:金 閎

                                                     ④監察御史


이렇게 보면, 영광김씨가문은 전형적인 문반가문으로서

개경에의 진출도 학문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질병으로 출사하지 못했던 김수녕과 음사한 김극검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지공거를 역임하였다.

더구나 김영부 때에 이르러서는 海州崔氏ㆍ慶源李氏와 통혼하는 등

문벌적 지위를 누렸다.

이는 김영부가 죽은 1172년만 하더라도 4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함으로써

당시에 이 가문의 거주지를 '平章洞'이라 일컬었으며,

그의 내외손 10여인이 관직에 포열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영광김씨가문이 성세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대대로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김심언처럼 고려사회에서 구심적 역할을 담당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광김씨도 김보당항쟁의 영향으로 무인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몰락함으로써 그 가계조차 망실하게 된 것이다.

 

 

 

영광김씨 문안공 김심언선생 동상 제막식

2013년 5월, 영광군 불갑저수지수변공원, 그러고 보니 최근 일이네요           

  

흐르는 곡은 고려 무신정권시대를 그린 드라마 ost - 규현의 인우 등

 

 

지역적으로 볼 때 영광 김씨의 뿌리가 전남 영광인지 /

시조 김심언이 활약한 개경(서울)인지는 알 수 없다.

 

 

김보당(金甫當) ?∼1173(명종 3).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광.
의종 때의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로 무신정권이 성립된 직후
1171년(명종 1) 우간의(右諫議)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9월 좌간의 김신윤(金莘尹),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소응(李紹膺) 좌사간(左司諫)
이응초(李應招), 우정언(右正言) 최당(崔당讜) 등과 더불어 의종 때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던
재상 최윤의(崔允儀), 간의 이원응(李元膺), 중승(中丞) 오중정(吳中正) 등과 대성(臺省)의 관직을
겸임한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였다.
이는 간관(諫官)의 고유권한을 행사함에 그치지 않고, 그의 소신이 전대에 붕괴된 정치질서의 회복이나
그것에 바탕을 둔 관료기구의 정상적인 운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준의는 술을 마시고 순검군(巡檢軍)을 시켜 간관을 욕보이게 하였으며, 명종은 이준의를
위로하고자 간관을 가두고 김신윤을 판대부사(判大府事), 그를 공부시랑으로 좌천시켰다.
이로 인해 명종에 대한 불신과 집권무신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점차 무신정권에 비판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축출되어 간의대부로 동북면병마사로 나가게 되었다.
1173년 이러한 조처에 불만을 품고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목적은 집권자인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을 몰아내고 전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장순석(張純錫)과 모의하여 장순석과 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아 의종을 호종하게 하고,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게 하니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장군 이의민(李義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나아가게 하고, 또 군사를 서해도에 보내어 반군을 진압하였다 한다.
 

전 아버지 영광 김씨, 어머니 김해 김씨

4형제중 3남

 

 

PS. 김 일성의 본관은 전주 김씨로 알려져...국내 족보엔 이름 없어

 

 

본관이 전주로 알려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주김씨 족보에 이름이 올라 있을까.

김 위원장은 지난달 12일 방북한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의 오찬 회동에서 “남쪽에 가서 그곳(시조 태서공의 묘가 있는 완주 모악산)에 갈 수 있으면 시조묘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도 생전에 자신의 본관이 ‘전주’임을 밝힌 바 있으며, 1992년 4월 발간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에서도 “우리 가문은 김계상 할아버지대에 살 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 대부터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나 김 주석의 족보 등재 여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주김씨 대동보가 현재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데다 지방별로 만들어지는 족보 가운데 김 주석과 선대가 살았던 평남 대동군 일대의 것이 누락되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주김씨 중앙종친회의 김진섭(82) 부회장은 “1915년께 한 차례 대동보가 만들어진 적이 있으나 6·25전쟁을 치르면서 모두 없어졌다”면서 “본인(김정일)이 전주김씨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확고한 근거, 이를 테면 제적등본이나 족보 등을 제시하면 종친으로 예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록별그린 라이프

/ 의학박사 김민섭

  

2013년 9월 7일 최초입력

2013년 11월 2일 추가보완

2017년 5월 18일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