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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 김일성의 소련의 신탁통치 찬성 (조만식 실각)->조국분단->6.25 남침->2년간 소모전->휴전 본문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 김일성의 소련의 신탁통치 찬성 (조만식 실각)->조국분단->6.25 남침->2년간 소모전->휴전
김민섭 [Dr. rafael] 2014. 10. 19. 14:22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 체제에서 해방된지 만 3년 만인
1948년 8월 15일 남에서 대한민국이 건국하고 약 3주 후인
1948년 9월 9일 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분단은 확정되었는데
이는 김 일성이 모스크바삼상회의(신탁통치)에 따른 결과였다.
이승만이 1875년생인데 비해 김일성은 1912년생,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37살이나 되었다.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개최된 평양군중대회에서 첫 모습을 나타냈을 때 나이는 불과 33세, 시쳇말로 그는 새파란 젊은이였다.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개최된 평양군중대회에 나타난 첫 모습, 당시 직책은 평양경비사령부 부사령관>
‘김일성 장군’ 하면 으레 백발이 성성한 노 혁명가를 연상했던 순진한 사람들에게 바리캉을 사용하여 깎아지른 것 같은 헤어스타일의 청년 김일성은 도무지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이것은 유격투쟁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당시 남측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60, 70대 고령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33세 청년 지도자의 모습은 낯선 것이 사실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김일성이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김일성은 한인들이 갈망하는 단결을 꾀하고자 시도하면서 민족주의와 혁명을 결합시키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고, 둘째 김일성은 그의 많은 선배나 동료들이 일제에 죽음을 당하거나 체포된 데 반해 자기 보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며, 셋째 김일성은 이미 1945년 이전에 전쟁 이후 한국 정치에 관련된 모든 주요한 세력들, 즉 일본인, 한국인, 소련인, 미 국무성까지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김일성은 중요하고 인정받은 항일 한인 게릴라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71쪽)
하지만 집권 투쟁은 독립운동과 또 다른 성격을 갖는다. 나는 이승만의 집권은 물론 김일성의 집권에서도 외세와의 함수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오히려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지원보다 더 명료했고 능률적이었다.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연구센타 소장 선즈화(沈志華) 교수가 집필한 『조선전쟁의 재탐구』에서는 8.15 이후 김일성이 북의 최고 지도자로 올라서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이 이승만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련도 김일성을 처음부터 지도자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승만과 김일성은 공히 약소국의 지도자였지만 강대국 앞에서 결코 호락호락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다만 이승만이 사용한 무기는 미국 인맥과 로비 그리고 권모술수와 영어 실력이었다면 김일성의 무기는 명분과 정치력과 러시아어 실력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일성은 1941년 러시아에 들어간 이후 러시아어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초 소련 태평양함대 푸카초프호에 탑승해 원산으로 입북했다. 10월 10일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기관지에는, “반동분자들이 두려워하는 김일성 동지가 돌아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이 돌아온 것은 조선 혁명사업의 크나큰 역량임은 의심할 바 없다”고 보도했다.
< 1945.10.14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정집회에 서있는 조만식, 10.28 이후 북방5도 행정지도국 위원장,
조선 민주당 창건(오른쪽 끝) >
김일성은 10월 14일 평양군중대회에서 조만식과 함께 연설했다. 그러나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지와 지도로 설립된 조선중앙관리기구인 북방5도 행정지도국 지도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위원장은 조만식이었고 당시 김일성의 공식 직책은 평양경비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소련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정책을 고수하려 했다. 그래서 자산계급 정부를 수립하여 미국과의 협조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소련이 처음에 조만식을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미국이 소련과의 협력보다는 반공냉전정책으로 급격히 변환한 데에 있었다.
조만식은 모스크바의 권고를 듣지 않고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심지어 남측 이승만과 김구가 벌이는 반탁운동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에 소련은 조만식을 실각시키고 연금 조치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자 조만식 역시 남측의 김구처럼 민족의 자존심만을 세울 줄 알았지 강대국 힘의 역학관계를 읽는 안목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소련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는 조만식 대신 김일성을 추천했다.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면서, “조선은 젊은 나라이니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당시까지 제1서기였던 김용범을 제2서기로 강등시키고 김일성을 제1서기로 선출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집권기반을 공고하게 다질 수가 있었다.
결국 이승만과 김일성의 집권은 남북분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은 이들이 집권했기 때문에 분단된 것이 아니라 미소가 조선을 분단시키기 위해 이들의 집권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유일한 핵보유국이 된 미국의 유일패권주의가 먼저 작동했다. 미국의 패권주의는 소련과의 협력 대신 공산권과의 냉전을 지향했고 이를 알게 된 소련도 냉전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 결과 우리 민족은 두 동강이 나고 만 것이었다.
김일성, 스탈린에게 48번 무릎 꿇은 사연은?
남침의 허락과 T-34전차 242대, 미그기 211대 등 무기와 병력 지원을 받기 위해..
6.25전쟁 북한군이 우리나라에 기습적으로 남침을 한것이다 이제 이 전쟁에 대해 설명을 하겠다
6.25 전쟁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허락에 동의하고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자 북한군이 일으킨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4시 북한이 3.8선 넘어 침입을 해왔다 그러자 3일만에 한강다리가 부서지자 3일안에 서울을 점령당했고 개전 25일만에 대전을 점령하고 개전 40일만에 낙동강 방어선을 치게 된다. 그때 우리에 무기 보유수는
개전 당시 남북한 군사력
남한 북한
남한군: 105,752명 북한군:198,800(약 2배 차이)
탱크수: 0대 T-34전자 242대
야포수 : 91문 728문(약 8배 차이)
함정 : 71척 함정110척(약 1.5배 차이)
항공기 : 22대 미그기 211(약9.5배)
↑
연습용 전투기 T-34전차 : 소련제 전차
미그기 : 소련제 항공기
보면 알겠지만 월등이 북한이 군사력 모든면에서 우수하다 그리고 우리는 대공포,자주포,전차(탱크)가 한대도 없어 밀리는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엔,미군에 도움으로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에 보급로와 대피로를 차단하자 남한에 있는 북한군은 포위 당하여 모두 투항하거나 산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래서 우리 군대는 압록강 까지 올라가서 적이 남은 땅은 신의주,중강진,초산 이렇게 작은 땅 3개 뿐이었지만 중공군에 개입으로 인해서 다시 3.8선까지 내려가고 1.4 후퇴같은 큰 후퇴작전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과 유엔에 열렬한 폭격과 공군의 공격으로 중공도 힘을 다하고 1953년 휴전 협정을 하게 된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6.25전쟁 피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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