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조선시대 최악의 군주, 조선왕조 가장 용렬한 임금은? (당시 이순신 장군, 왜군과의 마지막 해전에서 사실상 자살로 목숨을 버렸다는..) 본문

Our issu.&New thinking/+1)남북국제전반

조선시대 최악의 군주, 조선왕조 가장 용렬한 임금은? (당시 이순신 장군, 왜군과의 마지막 해전에서 사실상 자살로 목숨을 버렸다는..)

김민섭 [Dr. rafael] 2014. 10. 17. 08:30

조선시대 최악의 군주는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선조(조선14대 임금)와는 대조적으로 왜란 등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간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 (조선16대 임금) 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인해 중국의 후금(뒤에 청나라)이 쳐들어와 10여년동안 치욕스런 

정묘호란병자호란에 휩쓸리게 되고 왕권유지에 급급하여 아들 소현세자를 죽이고 심지어는 손자며느리 죽입니다.

 

정묘호란 & 병자호란(1627, 1636) 상황도

 

호란으로 비록 인질로 가긴 했으나 중국 청나라에서 선진 문물을 배운 소현세자가 살해되지 않고, 왕이  되었다면

조선말 미,프,독 통상 거부 정책으로 일제에 의한 강점도 없었을 것이며 조선 후대의 역사는 바뀔 수 있었을 겁니다.

 

그에 못지 않게 가장 용렬한 임금은

 

십만양병설 등을 무시하여 7, 8년동안  전국토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하면서도

적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떨던 조선 최고의 장수 이순신을 번번이 못마땅해하고 업신여긴

선조 (조선14대 임금) 할 수 있겠습니다. 

 

 

 

 

1592년 4월 이후 육지에선 왜군에 연전연패 파죽지세로 궁지에 몰린 조선,

당시 왕인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지 않고 한양에서 평양, 압록강변 의주(요동?)까지 도망가고,

급기야는 조명 연합군까지 평양에서 왜군에 참패하여 주둔해 있던 왕자들도 인질로 잡히게 되면서

자기가 머물고 있던 곳(요동?)까지 패전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자 

 

이순신이 왜군의 총 본산인 부산을 쳐야 왜군들이 기세가 꺽어 더 이상 북진할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유성룡의 말을 듣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 본진을바로 쳐들어가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 때 이순신은 1592년 7월 한산도 대첩으로 승전보를 올린 상태 

 

마침내 이순신은 9월 1일 부산포를 쳐서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게 아니었다 . 1597년 1월 왜군은 또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상황 

 

 

 

<1597년 1월 조선 남해안 일대 상황도> (붉은색 부분 왜군 주둔지역-총 병력 대략 2만명)

 

이에 선조는 또다시 조선 수군에게 즉시 부산 본진을 칠 것을 명하게 되는데..

 

이순신이 조선 수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왜의 육해군들이 수성하고 있는 부산 본진에 쳐들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산포까지 가는 도중의 왜 육군의 해안포와 내해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함선들도 이겨내야 하고,

외해로 돌아 나가서는 출전 거리도 긴 데다가 거친 폭풍에 휘말릴 수 있기에

 

즉시 쳐들어가서는 오히려 조선 수군이 괴멸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패전하게 되면 조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므로

병력을 보강할 시간이 필요하며, 그 때까지는 육지에서도 열심히 싸워 버텨주어야 한다는 이순신의 태도에

너는 왕의 안위보다 나라가 더 중요하냐며

 

해전에서의 연전연승과 천출에게도 관직을 주어 민심을 얻고 부산의 왜와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한다는

(선조가 일본 요시다의 이간계와 원균의 상소에 넘어간 것이라고는 하나) 역적 죄의 누명을 씌워서 압송하고

 

자복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하고

 

죽이려는 장면임.

 

이순신이 좌의정 윤두순의 취조와 고문에 의해 사형에 처해질 무렵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는지 우의정 판중추부사 정탁의 목숨건 간언에 의해

 

가까스로 망가진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어 백의종군하게 되고

 

 

 

 

 

선조의 왕명에 의해 경상우수사로 있던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300척을 이끌고 부산본진쪽으로 나아가 벌인 전투

(칠천량해전)에서 왜의 육해군 합동 공격을 받아 조선해군이 오히려 첫 패를 당하고 괴멸하면서 원균이 죽자,

 

선조 임금은 어쩔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여 칠전량해전에서 후퇴하는데 성공한  경상좌수사 배설의 12척을 갖고 출전하여

승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왜군들이 조선에서 모두 패퇴하게 되어 전쟁의 종지부를 찍게되는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죽게됨

 

 

 

임진왜란 & 정유재란(1592 ~ 1598) 상황도

 

그런데... 이순신 장군!

왜군을 최종 격퇴하게 되는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사망자는 4만명이었고

아군의 사망자는 10명밖에 안되었다는데

과연 왜군의 총탄에 의해 전사하게 된 것일까?

 

굳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고

사실 "노량해전때 자살설이 조선 당시에도 있었다"는데..

 

<역사특강>

 

(임진왜란때 도망가기 바빴던 임금 선조, 결국 이순신 장군과 유성룡(영의정) 제거해 - 이덕일 박사 역사특강에서)

 

이렇게, 임진왜란에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망명하려던 선조는

조선왕조의 가장 용렬한 임금이었습니다.

그의 부끄러운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당파(黨派)싸움의 시작을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며 조장ㆍ심화 시켜

국가가 피폐해졌다.
②외침대비를 위한 이율곡(李栗谷)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여 전란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③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의 난)로 1천여 명을 죽이고 호남을 역도(逆徒)의 땅으로 만들었다.
④통신사 황윤길(서인)을 무시한 채, 김성일(동인)의 말을 듣고 국방(國防)에 소홀하였다.
⑤전란을 피하여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접경지역인 의주(義州)로 도주하였고,

 전세가 불리하면 조선을 명(明)나라에 송두리째 넘기고 망명하려 하였다.
⑥조선의 절반을 왜군에게 넘겨주고 자신을 구하라는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지 않았다.
⑦전란 중에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을 해체시키고 의병장(義兵將)들을 처형하였다.
⑧선무공신(宣武功臣) 공적 평가를 심하게 왜곡시켜 간신들을 우대하였다.
⑨국가의 멸망 위기를 총체적으로 막아낸 명신 유성룡(柳成龍)에게 책임을 씌어 파직시켰다.
⑩명나라 조정의 칭송과 백성의 추앙을 받는 이순신(李舜臣)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⑪전란 중 15회의 선위(禪位) 파동으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혼란을 야기시켰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배경음악 중에서)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패전하게 되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육지를 수복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까? 

 

 

< 이순신 장군 해전 일지 >

 

1592년 4월 12일  임진왜란 발발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 전라 좌수영 여수 본영에서 출발 

(당시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수사)

 

1592년 5월7일 옥포 해전 <- 이순신의 왜군과의 첫 해전

91척(판옥선 29척, 협선17척, 포작선46척) vs 전선 50척

1명 부상 vs 전선 26척 격침, 4080명 전사

 

1592년 음력 5월 7일 합포 해전

92척 vs 전선 5척

없음 vs 5척격침

 

1592년 음력 5월 8일 적진포 해전

92척vs 전선 13척

없음 vs 11척 격침, 2840명 전사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 해전(거북선 첫 사용)

26척 vs 13척

없음 vs 13척격침, 2600명 전사

 

1592년 음력 6월 2일 당포 해전

? vs 21척

? vs 전선 21척 격침, 2820명 전사

 

1592년 음력 6월 5일 당항포 해전

51척 vs 26척

? vs 26척 격침, 2720명 전사

 

1592년 음력 6월 7일 율포 해전

? vs 10척

전사 11명, 부상 47명 vs 10척 격침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대첩

56척 vs 73척, 병력 1만 명

19명 전사, 116명 부상 vs 전선 59척 격침, 전선 14척 나포, 8980명 전사

육지는 거의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뤄낸 대승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계기가 됨

 

1592년 음력 7월 10일 안골포 해전

? vs 42척

없음 vs 전선 42척 모두 격침, 250명 전사

 

1592년 8월 29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

부산포 공격을 위한 출전 시작

 

1592년 음력 8월 29일 장림포 해전

173척 vs 전선 6척, 병력 30명

없음 vs 6척 모두 격침, 30명 도주

 

1592년 음력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 vs 5척

없음 vs 5척 모두 격침

 

1592년 음력 9월 1일 다대포 해전

? vs 전선 8척

없음 vs 전선 8척 모두 격침

 

1592년 음력 9월 1일 서평포 해전

? vs 전선 9척

없음 vs 전선 9척 모두 격침

 

1592년 음력 9월 1일 절영도 해전

? vs 전선 2척

없음 vs 2척 모두 격침

 

1592년 음력 9월 1일 초량목 해전

? vs 전선 4척

없음 vs 전선 4척 모두 격침

 

1592년 음력 9월 1일 부산포 해전

170척 vs 470척, 병력 7만 명

정운 전사, 6명 전사, 25명 부상 vs 128척 격침, 3800명 전사

 

1593년 음력 2월 1일 웅포 해전

89척 vs 전선 40척

전선 4척 전복 vs 왜군 100명 전사

 

1594년 음력 3월 4일 제2차 당항포 해전

124척 vs 31척

없음 vs 31척 격침

 

1594년 음력 10월 4일 장문포 해전

? vs ?

없음 vs 2척 격침

임진왜란 종료

 

1597년 1월 정유재란 발발

 

위기에 처한 선조, 이순신에게 부산 본진을 칠 것을 명함

(이순신, 신중한 태도를 취함 - 원균 조정에 상소, 이순신에게 갖은 고문을 가하고 사형을 명함)   

 

이순신의 백의종군

서울에서 순천까지 / 358.7km

• 정유년(1597년) 4월 1일
이순신은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28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신분은 여전히 죄인이었고,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라는 조정의 명이 내려졌다.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남대문 밖의 윤간이란 종의 집에서 조카 이분과 이봉, 차남인 울을 만났다.
또한 영의정 유성룡을 비롯하여 정탁, 전 도원수 김명원, 판서 심회수,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곽영 등이 각각 인편을 보내 위로와 안부를 전했다.

• 정유년(1597년) 4월 2일

이순신은 성안으로 들어가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을 방문했고,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 정유년(1597년) 4월 3일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과천(果川)과 인덕원(仁德院)을 거쳐 수원에 도착했고,
경기관찰사의 아래에서 심부름을 하는 이름 모를 군인의 집에서 유숙했다.
이순신을 압송하여 동행하는 이들은 금부도사 이사빈과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이었다.

• 정유년(1597년) 4월 4일
이순신은 수원을 출발하여 독성(禿城)을 지나 오산(烏山)에 이르러서는
황천상이란 자에게 말을 내어주는 도움을 받았다. 다시 평택에 도착한 이순신은
그날 밤 이낸손이란 자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 정유년(1597년) 4월 5일 ~ 10일

외가가 있는 아산 백암리에 도착한 이순신은 선영을 참배했고
닷새정도 친척과 이웃들의 위로와 환대를 받았다.

• 정유년(1597년) 4월 11일 ~ 18일
4월 11일 이순신의 어머니인 변씨가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으로 올라오던 중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고, 13일에 그 부음을 전해들었다. 이순신은 이 곳에서
입관을 하고 빈소를 차렸으나, 금부도사의 재촉으로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 정유년(1597년) 4월 19일

아산을 떠난 이순신은 회·울·면·해·봉·분·완 등 아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온양과 보산원을 거쳐 일신역에 이르러 하루를 쉬었다.

• 정유년(1597년) 4월 20일 ~ 5월 13일

노성과 여산·삼례·구례 등을 지나 이순신은 4월 27일 순천 송원에 도착했다.
그는 5월 13일 초계로 떠나는 17일 동안 송원에 머물렀다.



순천에서 초계까지 / 168.7km

• 정유년(1597년) 5월 14일
이순신은 순천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방법을 택했고,
송치를 거쳐 구례현에 도착했다.

• 정유년(1597년) 5월 15일 ~ 25일

이순신은 구례현에서 도체찰사 이원익을 만나는 등 25일까지 열흘 간 머물렀다.

• 정유년(1597년) 5월 26일 ~ 6월 1일
구례현을 떠난 이순신은 악양과 하동을 거쳐 6월 1일 단성 부근에서 유숙했다.

• 정유년(1597년) 6월 2일 ~ 6월 8일
이순신은 단계와 삼가현을 거쳐 초계로 향했다. 그는 도원수의 진영이 가까운
모여곡이란 마을에 거처를 정했다. 그는 6월 8일에 도원수인 권율을 만났다.

• 정유년(1597년) 6월 9일 ~ 7월 17일
이순신은 권율의 휘하로서 초계에 머물렀다. 수군통제영의 소식을 계속해서 접할 수 있었고,
7월 18일 원균이 이끄는 삼도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했다는 패전소식을 듣게 되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 <-  원균이 지휘

300척(임진왜란후 130척 증선됨) vs 1000척 (정유재란에서 대규모로 증선)

판옥선(거북선 포함) 288척 격침 vs 왜군 피해 모름

 

원균의 무모한 출전과  경상좌수사 배설의 공격이 연거푸 패한후

부산을 급습하려다 이를 알아챈 왜군에 의해 부산 앞바다에서 고전하다 후퇴,

무방비 휴식상태에서 칠전량에서 조선 수군 288척 전멸

원균이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고, 배설군만 도주하여 12척만 살아옴

 

1597년 음력 8월 27일 어란포 해전 <-  이순신 복귀, 12척으로 출전 시작, 벽파진으로 이동

12척 vs 8척

없음 vs 도주함

 

이순신의 12척 : 왜적 1000여척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로 권율 장군의 전라도 방어선마저 풍전등화에 몰리자

권율의 권고와 선조의 왕명으로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명을 받아 또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됨

 

그러나 "소신은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1597년 음력 9월 7일 벽파진 해전

12척 vs 13척

없음 vs 도주함

이순신은  벽파진 주둔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 명랑(울돌목) 해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음

(어란포,벽파진은 왜군이 명량 통과를 위해 정찰을 온듯함)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

13척, 병력 1170명 vs 333척, 병력 2만 6600명

없음 vs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31척 격침, 92척 파손 및 도주, 18466명 전사

(왜군이 승리하여 명랑을 통과했다면 곧바로 서해로 진출하여 조선 임금이 머물러 있던 한양이나 평양, 의주,

명나라까지 진출할 수 있었음)

 

1598년 음력 7월 19일 절이도 해전 <- 명량이후 10개월만에 조선함 170척으로 증가, 이 때부터 명나라 수군도 참전

조선 수군 170척, 병력 1만 7000명, 명수군 128척, 병력 2만 60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만 3000명

vs 100척

30명 사상 vs 50척 격침, 50척 파손

 

1598년 음력 10월 2일 - 음력 10월 4일 장도 해전(순천왜교성)

조선 수군 170척, 병력 1만 7000명

명 수군 128척, 병력 2만 60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만 3000명

vs ?

명 수군 62척 격침, 2300명 전사, 조선군 360명 사상 vs 30척 파손, 11척 나포

(명군의 수륙양면공격 팀웍실패, 썰물에 갇힌 명선 구조과정에서 피해커짐)

 

1598년 음력 11월 19일 노량 해전 <- 이순신 전사? 

조선 수군 170척, 병력 1만 6640명

명수군 66척, 병력 2만 3700명

총병력 전선 236척, 병력 4만 340명 vs 왜군 500척

 

이순신등 10명 전사, 300명 부상 vs 왜군 200척 격침, 150척 파손, 100척 나포, 4만 명 전사,

1만 3000명 부상, 50척 도주 정유재란 종료 

적은 4만명이 전사하고 조선 수군은 10명밖에 전사 안했는데

그중에명이 하필 이순신 장군?

 

조선 수군 피해 

총 피해 2348명 전사(명군 포함), 492명 부상, 불명 390명, 전선 211척 격침(명군 포함), 총 사상자 3230명

 

왜군 피해

총 피해 7만 6170명 전사, 1만 3000명 부상, 전선 1039척 격침, 170척 파손, 131척 나포,

총 사상자 8만 9170명, 전선 1493척 피해

(1493척이 피해를 봤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배가 있었을까..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