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6.25 오늘] 북한군 새벽 4시 기습 남침 (이후 남북간 전쟁 전개 과정) 본문

Welcome to green life/+ 국경일 등에

[6.25 오늘] 북한군 새벽 4시 기습 남침 (이후 남북간 전쟁 전개 과정)

김민섭 [Dr. rafael] 2016. 6. 25. 13:26

전투개시 암호명  '폭풍' 으로

소련에 사전 보고된 정찰 명령서와 작전 명령서에 의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야포의 일제 포격과

전투기 170대, T-34 전차 (탱크) 250대를 앞세워 남침 공격 (전쟁 2일후 정찰 보고 명령도 사전에 지시됨)

 개전 상황 해설 + 북한군 아나운서 전쟁 3일후 서울 함락 방송.mp3 



공개된 김일성(본명 김성주)의 전투명령서 1호 - 6월 22일까지 전투 준비를 완료할 것을 지시




소련에 사전 보고된 작전명령서




6.25남침 1주일 전 소련에 보고된 정찰명령서 1호




6.25남침 1주일 전 소련에 보고된 정찰명령서 1호 내부 시달용 번역 (작전 계획으로 구체화되어 있음)




▲ 6.25전쟁 직전의 남북 군사력 비교



▲ 이상과 같이 준비된 북한군 전략과 전술 및 무기 체계



▲ 개전 이후 국군 후퇴 상황도 (1950년 8월 15일까지)

 1950 6 25 기습 남침공격이 개시된 이래 국군은 변변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내려 갔다.

 김일성이 전선지휘관들에게 강력하게 지시한 남한 해방의 시한은 8 15일이었다

 비록 한국군 사단의 절반과 24사단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밀려났으나 전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남쪽에 유리해졌다.

 미군의 전선 증강의 속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도를 내었다



▲ 개전 이후 공산군 남침 상황도 (1950년 9월 15 ~18일까지)

   8월부터 1개월 이상을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 - 이래서 한강만 강이냐 낙동강도 강이다 라는말이 나왔던게 아닌가하는

   북한군이 전선 여러 곳을 동시에 공략하지 않고 어느 한 곳에 집중했었더라면 무너질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  낙동강

     1950년 9월 당시 이곳에는 한국군보다 더 많은 미군이 투입된걸로 기록되어 있음


▲ 인천상륙작전 1,2주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상황도

   (인천 서울 부근은 작전 13일 이후 상황, 낙동강 라인은 미국 공군기의 집중적인 근접 포화에도

    꿈쩍않고 버티더니 인천 상륙 소문이 파급된 후에야 사기 저하로 전열이 급속히 와해)




▲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김일성과 박헌영

   -1950년10월1일 중국 마오쩌둥에 군사지원요청 편지 보내




밑줄친 부분의 편지 원본 사진 -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하자 패퇴하며 다급하게 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남.  이대로 UN 미국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어올 때에는 자기들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약속한 대로 중국인민군이 출동해주기 바란다는



 앞서 1950년 1월 12일

미국은 북조선,중국,소련의 위협성을 인식하지 못한채,
그들을 자극시키지 않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방위라인에서 제외한 성명을 발표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조선중앙통신사는 즉각 전화를 걸어, 김일성의 비서에게 알려주었다.
김일성은 직접 전화를 걸어 비서로부터 그 정보를 확인했다.

사실이라고 판단한 김일성은 곧바로 남침을 지시하였다.

그 정보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었다




6월 25일

06:00 - 북조선의 남침소식이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에 보고됨

06:30 - 전군에 비상소집을 명령

07:00 - 전국에 라디오로 속보 방송

10:00 - 이승만에게 보고

12:00 - 서울상공에 적기가 공습을 시작함

김일성은 공화국남부의 빨치산 제군들에게 봉기를 명령했다.
이승만은 조국존망의 운이 걸려있는 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한다.

각 사단은 수도 사수의 최종점인 의정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전한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수호신으로 불리던 T-34전차 앞에 의정부를 담당하던 7사단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6월 26일

01:00 - 포천이 함락되다

14:00 - UN안보리가 북조선에게 남침 중지를 요구하다

15:00 - 의정부가 함락되다


6월 27일

03:00 - 수원으로 천도


6월 28일

02:00 - 북조선군이 서울에 입성

70만명의 서울시민이 남쪽으로 피난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조선군의 폭격과 학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서울시민은 150만명에 달했다


상황을 지켜본 맥아더는 "이대로라면 한강의 사수도 보장할 수 없다"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한국군 병사는 맥아더에게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각오를 보인다.
결국, 맥아더는 도쿄에 돌아가 육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미국은 즉각 UN군의 주력으로서, 육해공군 약 25만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단기간내에 모든 병력을 투입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도쿄의 美해군과 공군을 투입시켜, 남침을 지연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7월 2일 미육군 선발대가 도착하였다

그러나...상황은


7월 3일 - 북조선군이 한강을 도하

7월 4일 - 수원 함락

7월 5일 - 美스미스 지원 부대가 북조선군에 패배, 오산 함락되다

7월 10일 - 美제25사단 본대 도착

7월 20일 - 美제24사단 북조선군에 대패, 대전 함락되다

결국, 전선은 낙동강까지 내려오게 된다
김일성은 해방 5주년인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UN군 지휘관인 워커 중장은 "한국에서 절대 철수하지 않는다. 케르크[Dunkerque]의 전철은 절대 밟지 않는다"라고 천명한다.

백선엽 장군도 성명을 통해 "지금까지 잘 싸워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부동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대구는 지킬 수 없게 되고, 부산도 함락된다. 그렇게되면, 우리가 갈 곳은 없다. 그래서 조국의 존망은 우리에게 걸려있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멀리 지구의 반대편에서 도우러 와준 미군과 UN군이 함께 싸우고 있다. 그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있을까? 지금부터 돌격해 나가자!"라고 격려.

9월 1일의 필사항전을 이끌어내고, 군산 상륙과 주문진 상륙 작전을 시도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Chromite계획)에 성공하여 상황은 역전되었다

9월 16일에는 슬래지 해머작전이 개시되고, 9월 23일에는 북조선군이 후퇴, 잔당은 게릴라화 된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한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에서는 이 여세를 몰아 북진할 것인가, 아님 38선에서 멈추어야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38선에서 멈추면, 북조선군이 다시 반격할 위험이 있지만, 38을 넘어도 소련과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확산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승만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대로 한반도가 통일될 것을 요구한다"라고 성명을 발표. 미국에 북진 허가를 요구하였다.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10월 1일 북진을 개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다"라고 성명을 발표, 미국에게 38선을 넘지 말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이를 단순한 공갈협박으로 판단하였다.

그 때,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원군 요청이 있었다. 미국은 강하지만 스탈린의 지원이 있다면 걱정할 게 없다"라며, 한국전쟁 참전을 결심한다. 주은래는 즉각,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중국 본토는 소련 공군이 지켜줄 수 있지만, 한반도에서 미국과 대결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라고 말해, 참전 요구를 거부하였다.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을시, 싸워도 승산이 없는 중국으로서는 난감했다. 게다가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하면, 구 만주국 시절에 세워진 공업기반도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10월 7일

UN안보리는 UN군이 북진하는 것을 결의한다. 트루먼 대통령도 중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 판단해,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만약 중국이 남진한다면,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10월 8일

UN군의 북진이 개시되었다. 모택동은 "이미 활시위는 떠났다"라고 발언해, '항美원朝의용군'을 투입시킨다.

항미원조의용군은 인해전술을 기반으로 국군 제2사단을 물리친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미그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MIG-15기가 한반도에 온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은 피하는 대신 평양 이북 지역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38선은 다시 붕괴되었다. 다급해진 트루먼은 휴전 제의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맥아더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는 만주에 폭격을 할 수 있도록 트루먼에게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우리는 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라며 일축. UN을 통해 임시 정전을중국에 제의하였다.

그것에 대해, 중국측은 "정전에는 찬성하지만, 중국이 임시로 UN에 가맹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라며, 이사국 진출을 염두한 조건 제시를 제의하였다.

트루먼은 분노했다. 사실상의 거부선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맥아더는 "중국군의 군세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며, 강경하게 나올것을 주문하였고, UN총회는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깃 작전을 통해 38선을 다시 수복한다.

하지만, 철원,평강,김화의 '철의 삼각지대'는 더 이상의 전개를 가로막았다. (철의 삼각지대는 방어는 수월하나 공격은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 6.25 한국전쟁 3년 1개월간의 전황 지도


그 후, 양진영은 38선을 중심으로 강고한 진지가 구축되어, 교착상태에 빠진다

51년 4월 11일에는 강경론을 요구(:북진)하는 맥아더가 트루먼과 갈등을 빚어 사임당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6월 23일에는 소련 대표가 안보리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휴전교섭이 열리지만, 계속 결렬되고 만다.


53년 3월 5일 - 스탈린 서거

7월 27일 -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 전쟁은 수 많은 상처를 남긴채, 지금까지도 '정전'이 아닌 '휴전'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