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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자 사회에 고하는 제언

김민섭 [Dr. rafael] 2010. 10. 14. 00:10

 

노벨상보다 필요한 건 아인슈타인이다

한국과학자 사회에 고하는 제언 2010년 10월 13일(수)

미르(miR) 이야기 문화로서의 과학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동의와 과학자사회의 각성이 필요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사회구성원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연구의 정당성은 실제로 과학이 줄 수 있는 것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구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과학자들이 언론을 통해 연구의 효과를 과장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부풀려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이유다. 또한 과학자들이 논문을 조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화로서의 과학은 사회의 구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결국 과학자 사회의 각성은 문화로서의 과학을 정착시키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는 정치적인 행위나 다름 없다.

한국사회에 과학이 수입된 역사는 수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과학을 발전시켜온 일본과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지 유신이 문화로서의 과학을 모토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양무운동을 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구로 수입했던 역사가 있다. 양무운동이 과학을 철저히 기술의 관점에서 도구로 수입했던 것에 비해, 메이지 유신에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일본도 과학을 도구로 수입했지만 그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제도를 모두 서양으로부터 베껴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 문화로서의 과학이 정착한 상이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벗어난다. 문화로서의 과학을 정착시키기 위해 서구의 문화를 그대로 수입하자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과학이 수입되고 정착되는 과정 역시 복잡하다. 그곳엔 문화와 제도, 개개인들의 다양한 영향력이 군데군데 얽혀 있다.

다만 한국에서 과학이 정착하는 과정의 독특한 측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화기에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수입된 과학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식민지 시대 속으로 함몰됐다.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간헐적인 과학운동이 존재했지만 독립운동의 기수들에게조차 과학은 긴급한 사안이 될 수 없었다. 여기에 첫 번째 단절이 존재한다.

해방 이후 다시 전쟁을 겪고 그 상처를 치유할 즈음에서야 과학이라는 것이 사회구성원들에게 논의될 수 있었다. 상황은 열악했고, 당장 시급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굶지 않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배부르게 과학을 논의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이 사회구성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된다. 기술을 중심으로 한 박정희의 정책은 한국과학기술정책의 판도를 뒤바꿔 놓았다. 도구로서의 과학이라는 이념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됐고, 사회 구석구석에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국민들이 여유를 찾고 문화로서의 과학에 눈을 돌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두 번째 단절이 존재한다1.

두 번의 단절을 겪으면서 문화로서의 과학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식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구로서의 과학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두 번의 단절을 겪으면서 일본처럼 문화로서의 과학이 정착하는 계기를, 우리는 갖지 못했다. 과학이 문화 속에 정착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민주화로, 경제발전으로 정신이 없었다. 문화로서의 과학은 사치에 불과했다.

각성제로서의 과학사

문화로서의 과학, 과학이 문화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겪은 불행 때문에 과학사는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다른 어느 사회보다 중요하게 인식돼야 한다. 서구의 과학사는 결국 문화로서의 과학을 다루는 분야이므로, 한국의 과학사 또한 문화로서의 과학을 다룰 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문화로서의 과학이란 과학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다른 학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사회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가는 과정 그 자체이므로, 한국의 과학사는 이제 막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과학은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고, 광우병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사회는 전세계에서 유래 없는 독특한 과학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문화로서의 과학이 탄탄하게 자리잡은 이후에 터져 나왔어도 제대로 논의가 어려웠을 크나큰 사건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접하고 있다. 과학기술부가 폐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초라한 과학자사회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헉슬리처럼, 반네바 부쉬처럼, 제임스 코넌트처럼, 건강한 철학을 지닌 과학의 수호자들이 일선의 과학자들을 우산처럼 보호하면서 독립된 연구를 보장해준 경험을, 우리는 해보지 못했다.

 

 

▲ 한국사회도 단순히 노벨상을 넘어 아인슈타인을 가져봐야 한다. 한 과학자가 당당한 지식인으로서 대접받고, 과학자가 내놓는 화두들이 전 사회에 울림을 주는 그런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한국의 과학, 어린 아이들에게 아인슈타인과 다윈의 꿈을 이야기해줄 때의 과학, 노벨과학상을 논의할 때의 그 과학, 즉 문화로서의 과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또한 그것이 바로, 한국의 과학자 사회에 과학사의 인식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자 사회가 인지되는 기형적인 방식, 국민들이 과학을 인지하게 되는 그 방식, 과학이 단지 도구로서만 활용되는 그 방식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과학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이라는 독특한 사회에서, 과학사는 과학자 사회의 각성제가 된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기능강화가 과학기술계의 화두로 떠오르는 지금, 과학자들은 과학사에 눈을 떠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일본과 중국, 독일,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들이 이공계 출신이라는 표면적인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나라에서 이공계 출신이 정치지도자가 된 배경에는 오랜 시간의 문화적 전통이 배어 있다. 이공계 출신이 대통령이 돼도 그 어떤 국민적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문화적 전통, 바로 거기에는 사회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가 존재하는 것이며, 문화로서의 과학이 설 공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한 문화로서의 과학이 정착한 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안다는 것은 그러한 문화가 정착된 역사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문화로서의 과학이 정착하고, 과학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며 사회구성원들의 지지를 받고, 과학의 선진국이 되는 이면에는 과학자사회의 노력과 사회의 제도 및 문화가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그들의 문화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을 시도하려면, 과학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그래야만 과학자사회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를 설득시키면서 정치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사회도 단순히 노벨상을 넘어 아인슈타인을 가져봐야 한다. 한 과학자가 당당한 지식인으로서 대접받고, 과학자가 내놓는 화두들이 전 사회에 울림을 주는 그런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부국강병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사회가 과학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때에서야 과학 한국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춤사위 속에서, 문화는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역사도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 김영식; 김근배,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in 창작과 비평사, (1998).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저작권자 2010.10.13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