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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김민섭 [Dr. rafael] 2010. 10. 18. 08:25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우리는 맥아더를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영웅으로, 아이젠하워는 미국 34대 대통령으로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아이젠하워는 몰라도 맥아더는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이둘 오성장군 출신 영웅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의 출발점은 매우 달랐다. 맥아더는 미 육군 고위 장교의 아들로 1880년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나, 아이젠하워는 1890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 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수재형 맥아더는 1903년 졸업생 164명중 수석으로 아이젠하워는 1915년 164명 중 학과(學課)로는 61등, 기율(紀律)로는 125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30년 맥아더가 50대로 미 육군 최연소 대장(사성장군)으로 참모총장 일 때 아이젠하워는 무명의 소령이었으며,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16년 만에 중령으로 진급할 만큼 그는 그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아이젠하워는 그의참모였으며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 고문단장 이었을 때는 그의 부관이었다. 미국에서 두 인물을 후세에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맥아더는 수재 형 이지만 아집이 강하고 정치적인 쇼맨십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야망도 컷던 인물인 반면 아이젠하워는 유럽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강한 군인 이미지 대신 소탈한 외모와 천진난만한 미소로 미국 국민에게 가장 친근했던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가끔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시찰 사진을 살펴보면 두인물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 볼 수 있다. 맥아더의 사진은 대부분, 선그라스를 끼고 백파이프를 물고 찍은 모습이 많은데 이것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맥아더에 의해 설정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반면 아이젠하워의 사진은 전투현장에서 항상 표정이 밝고 장병들과 격이 없이 지내는 장면들이 많았다. 또한 아이젠하워의 부하들은 항상 진급에 있어서 승승장구하여 중장, 대장까지 진급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후임으로 육군대장으로 참모 총장이 된 이가 유럽전선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브래들리 대장이며, 그 유명한 패튼장군 또한 전쟁중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대장승진은 무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전쟁당시 미8군사령관 워커중장 (한국전 당시 교통사고로 사망) 역시 아이젠하워의 부하였다. 이에 반하여 맥아더의 부하들은 육군대장으로 진급한 이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하여간 대기만성형 아이젠하워가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는 결정적 계기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마셜 미 육군 참모총장의 신임을 받으면서 부터다. 마셜이 아이젠하워를 유럽주둔 연합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신임을 하게 된 것은 아이젠하워가 평소 성격이 소탈할 뿐만 아니라 연합군내의 자존심이 강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군 장성들의 관계를 잘 정리 할 줄 알았고 그들의 의견에 경청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갈등이 많았던 이들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을 중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아이젠하워였다. 특히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 자신의 부하였지만, 독불장군이었던 패튼, 소련의 육군 원수 쥬코프등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항상 노력하였으며, 하급 장교및 부하들에게도 격없이 대하여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애칭이 아이크(I like의 준말)가된 것이다. 이런 그의 민주적인 리더십은 모든 작전에 빛을 발휘하여 1942년에 소장을 거쳐 중장, 1944년에 대장이 되었으며. 마침내 곧바로 맥아더와 함께 원수로 승진했다. 그 후 두 사람 생의 명암은 바뀌게 된다. 1951년에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퇴역장군이 되었지만 아이젠하워는 미국 34대 대통령에 당선돼 8년 동안 미국을 이끌었다. 이처럼 인생은 마라톤과 같아 전반에 잘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반에 강한 사람도 있다. 오늘 남보다 앞서 달린다고 오만해서도 안 되고 남보다 뒤졌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빨리 가려고 비정상적인 지름길을 택하면 후회가 뒤따른다. 궁하다고 의를 저버리지 않으며, 뜻을 이루었다고 도를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온 힘을 다해 달리다 보면 인정받는 기회가 꼭 올 것이다. 맥아더와 아이젠 하워의 약력 맥아더(1880~1964)/아이젠하워(1890~1969) 1880년: 맥아더 미국 육군 장군 아서 맥아더의 셋째아들로 태어남 1890년: 아이젠하워 노동자인 제이콥 아이젠 하워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남 1903년: 맥아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수석졸업 1915년: 아이젠하워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164명중 학과 61등 기율 125등으로 졸업 1918년: 맥아더 준장으로 진급 1925년: 맥아더 소장으로 진급 1930년: 아이젠하워 소령 (당시 맥아더 최연소 미 육군대장겸 참모총장) 1933년: 아이젠하워 소령으로 미 육군참모총장 맥아더의 참모 1935년: 아이젠하워 중령으로 필리핀 미 군사령관 맥아더의 참모 1937년: 맥아더 육군대장으로 예편 1939년: 아이젠하워 2차세계대전 직전에도 중령 1941년: 아이젠하워 대령/준장으로 진급 (당시 맥아더 육군 대장으로 현역복귀) 1942년: 아이젠하워 소장/중장으로 진급 (유럽주둔/북아프리카 연합군총사령관) 1944년: 아이젠하워 대장/원수로 진급 (당시 맥아더와 같이 원수 오성장군이됨) 1945년: 아이젠하워 미 육군 참모총장 1948년: 아이젠하워 존경받는 군인으로 예편 컬럼비아대학 총장 1950년: 맥아더 한국전 유엔군 총사령관 1951년: 맥아더 투루먼에 의해 현역에서 강제예편 1953년~1961년: 아이젠하워 미국 제34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