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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진정한 충신의 표본..상산 조자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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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진정한 충신의 표본..상산 조자룡

김민섭 [Dr. rafael] 2010. 11. 11. 20:10

 

 

삼국지엔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허나 나를 가장 사로잡은 영웅은 바로 이 남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본토에서도 언제나 삼국지 최상의 인기도를 자랑하는

상산 조자룡.

 

연의에서 수십만의 조조군을 헤치고 주군의 아들인 아두를 구해오던

그 장판파의 신화.

 

요즘 정사를 대충 보고 조운은 과대평가다..뭐다 말이 참 많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어디까지 찾아봤냐??라는 것이다.

 

인정한다.연의에선 너무나도 과장된게 많다.

수십만 대군을 헤치고 아두를 구해온건 사실 수천 기병대였고

연의에서 나오는 그 빛나는 일기토 무용도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러 나...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연의는 소설이다.

조운만 그렇게 과장된게 아니라 타 장수 역시 사서에 없는 무용들이 기록되어잇다

(관우의 오관돌파,여포와 유관장 형제의 호로관 사투,장비와 마초의 빛나는 혈전,마초와 허저의 사투등등등)

이런건 사서에 전혀 나와있지 않다.서로 멋지게 치고박고 하는게 기록되어 있을리가 없지.

근데 유독 조운은 무용이 과장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너무나 완벽한 남자라서??

그렇다고 볼수도 있다.

사서를 찾아봐도 그에겐 약점이라곤 없으니.

전장에서 불패를 자랑한 맹장이요

군자의 풍모를 지닌 인격에다 끝없는 주군에대한 충성심.

말그대로 사나이중에 사나이.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권36 『조운전(趙雲傳)』  
 
조운의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군 진정(眞定)현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게 속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를 보내 전해(田楷; 청주자사)를 위해 원소에 항거케 하였는데, 조운이 마침내 따라다니면서 선주의 주기(主騎)가 되었다.
 
선주가 조공(曹公=조조)에게 당양 장판(當陽 長阪)에게 추격당할 때,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이 몸소 유비의 어린 아들을 품어오니 이가 곧 후주(後主=유선)이요, 감부인(甘夫人)을 보호하니 곧 후주의 모친으로, 모두 난을 면하게 되었다.
 
승진하여 아문장군(牙門將軍)이 되었다. 선주가 촉에 들어가니, 조운은 형주에 머물러 있었다. 선주가 가맹(가萌)에서 돌아와 유장(劉璋)을 공격하면서, 제갈량을 불렀다.
 
제가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거느리고 같이 장강을 거슬로 올라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러, 조운을 분견해 외곽의 물가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만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되고 난 후,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건흥(建興) 원년(223)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고,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했다.
 5년(228) 제갈량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다음해, 제갈량이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사곡도(斜谷道)로 나와 명성을 날리니, 조진(趙眞)이 대병을 보내 그를 대처하게 했다. 제갈량이 조운과 등지(鄧芝)에게 영을 내려 가서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箕谷)에서 이로운 전세를 잃었지만, 병사를 거둬모아 굳건히 지키니,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대가 퇴각하자,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좌천되었다.
 
처음, 선주때는 법정(法正)만이 시호를 받았고, 후주(유선)때는 제갈량의 공덕이 세상을 뒤엎었고 장완(蔣琬) 비의(費褘)는 국사의 중임을 맡아 또한 시호를 받았다. 진지(陳祗)는 총애를 받아 특별히 다른 것이 더해졌고, 하후패(夏侯覇)는 먼 곳에서 귀국하였기에 다시 시호를 받았다. 이에 관우, 장비, 마초(馬超), 방통(龐統), 황충 및 조운은 시호를 추증받았는데, 당시의 여론은 이를 영예로 여겼다.
 
조운의 아들 조통(趙統)이 후사를 이었는데, 관직이 호분낭중(虎賁中郞) 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자 조광(趙廣)은 아문장(牙門將)이 되어 강유(姜維)를 따라 답중(沓中)으로 갔다가 군진에 임하여 전사했다.

 

 

 

일단 촉서만 보면 별다른 기록이 없다.

좀더 자세히 기록한 배송지의 조운별전을 보자.

 

일단 배송지주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


진수(陳壽)의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가 너무 간략하고 내용이 빈약하여 남송 사람인 배송지(裵松之)가 주(註)를 단 것이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이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는 전24권으로 되어 있다. <삼구지주三國志註>에는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에서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다른 것과 비교하여 터무니 없는 내용은 정정하고 수정하였으며, 배송지(裵松之) 자신의 고증과 논변을 첨가하였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는 과거 문헌들에서 200여 종을 발굴하여 역사 자료를 보총하였는데, 그 분량이 본문의 세 배에 달한다고 한다.

저자 배송지(裵松之)는 누구인가?

배송지(裵松之)의 자는 세기(世基)이며, 남송(南宋) 사람으로 중서시랑이란 벼슬을 지내다가 남송(南宋)황제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 <삼국지주三國志註>를 집필하였다.

 

 

<조운별전>


1. 조운은 신장이 8척에 풍채는 크고 늠름했다.  본래 군에서 천거되었고, 의를 따르는 아전과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을 칭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은 기주의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우려했다.  그래서 조운이 자기에게 온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들으니 그대의 주 사람들이 모두 원씨를 원한다고 하던데, 그대는 어찌하여 혼자 마음을 돌렸는가? 마음이 혼란스러워 혼자 반하는(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

이에 조운은 이렇게 대답했다.

“ 천하가 심히 어지러운 때인지라 백성들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다, 현에 재앙이 닥치면 백성들에게는 곧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고을에서는 어진 정치를 펴는 쪽을 따르겠다는 것일 뿐, 원공을 홀대하거나 장군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

그리고는 공손찬을 따라 정벌길에 올랐다. 

이때 선주 역시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선주는 조운과 자주 만나 사귀었다.  이에 조운은 스스로 선주에게 의탁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 조운의 형님이 상을 당하자 공손찬의 양해를 얻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하자,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 그간 입었던 덕을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뒷날 선주가 원소를 따르게 되었을 때, 조운은 업에서 선주를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한 침상에 누워 잠을 자며, 몰래 조운을 보내 병사 수백 명을 모집하게 했다.  그러자 (모인 병사들이) 모두 유 좌장군의 부곡(호족의 사병)이라고 칭했지만, 원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후에 조운은 선주를 따라 형주로 갔다.


2. 처음에 선주가 패하자 조운이 북쪽으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는 손에 극(무기 종류)을 들고 소리쳤다. 

“ 자룡은 나를 버리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운이 도착했다.

조운은 강남을 평정하고 편장군이 되었고, 계양태수를 겸하여 조범을 대신했다.  조범에게는 번씨라는 형수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이에 조범은 형수를 조운과 짝지어 주려고 했지만, 조운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 경(호칭)은 나와 같은 성씨이니 경의 형수는 곧 나의 형수와 같은 것이오. ”

조운은 끝까지 사양하며 배필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조운에게 번씨를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운은 이렇게 말하며 번씨를 취하지 않았다.

“ 조범이 항복하여 따르기로 했지만 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더욱이 천하에 여자는 많은데 어찌 급히 취하려 한단 말이오. ”

(그의 말처럼)과연 조범은 달아났으나, 조운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3. 전에 조운이 하후돈과 박망에서 싸우면서 하후란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다.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 사람이었지만, 서로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선주에게 하후란이 법률에 밝아 군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며 천거했다.  그러면서도 조운은 하후란이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의 삼가고 살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4. 선주가 익주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사마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는 손권의 누이 손부인이 있엇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린 채,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집안일을 맡겨’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듯 함) 당시 손권은 유비가 서정 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어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5. 익주가 평정된 뒤, 여러 장수들에게 성문 밖의 뽕나무 밭을 나누어 주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성도의 옥사(임시로 지은 거처)에 모였는데 조운이 나서서 이를 반대했다.

“ 곽거병(한무제때의 장수.  흉노토벌로 명망이 높음)은 아직 흉노를 토벌하지 못했다고 하여 황제가 내린 집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당시 무제는 곽거병에게 집을 지어주었는데, 곽거병은 이것을 보고 ” 흉노를 토벌할 때까지 이런 집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라고 대답했다.) 지금 나라의 적은 비단 흉노만이 아닐진대 어찌 편안함을 구하겠습니까? 모름지기 천하가 평정된 후라고 해도 뽕나무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주의 백성들은 처음 병란을 겪어 어려움이 많았으니, 밭과 집을 돌려주고 영을 내려 편안히 거주하며 생업에 복귀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부역을 줄여준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선주는 그의 말을 따랐다.  

 

 

6. 하후연이 패한 후, 조공은 한중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량미를 북산 아래로 운반하였는데, 군량은 수천만 포대나 되었다.  황충이 이를 취하려 하자, 조운도 군사를 이끌고 따라나섰다.  황충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경무장한 수십 기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황충을 찾아 나섰다.  이 때 조공의 대군이 나탔났는데, 조공이 병사들을 출전시키자(‘조공의 병사들을 보자마자’ 라고 생각하는 쪽이 의미는 더 통함)조운은 그 앞의 한 곳을 날카롭게 공격하며 싸웠다.  대군이 점점 다가와 형세는 위급해졋지만, 조운은 그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찼았다.  조공의 군사는 패했으나 다시 세를 모아 주위를 포위했다.  조운은 적진에 빠져 있엇지만 곧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장수 장저가 부상을 입어 (포위를 뚫지 못하자) 조운은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 구해 데려왔다.

이때 면양에는 장익이 있었는데, 조공의 군사가 추격하여 주위를 포위하자 장익은 문을 닫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조운은 진영으로 들어오자 문을 다시 크게 열더니 기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공의 군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곧 물러갔다.  조운은 다시 하늘이 진동할 듯한 북을 울리며 조공의 군사들의 뒤에 쇠뇌를 쏘아댔다.  조공의 군사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짓밟고 밟히며 한수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음날 아침, 선주는 조운의 진영으로 와서 그가 싸운 곳을 둘러보더니

“ 자룡의 몸은 담력 덩어리구나! ”

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주연을 베풀어 먹고 마셨다.  (이때부터)군중에서는 조운은 일컬어 호위장군(범의 위세를 가진 장군)이라고 불렀다.


7. 손권이 형주를 기습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손권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조운이 나서서 간했다.

“ 국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그러니 먼저 위를 멸하면 오는 곧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비록 조조의 몸은 죽었다 해도, 그의 아들 조비가 제위를 도적질하여 찬탈했으니,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 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선주는 듣지 않고 동정길에 오르며, 조운을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를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으나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


8. 제갈량이 말하기를

“ 가정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 장졸들은 돌아오지 못해 흩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기곡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는 능히 장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된 연고인가? ”

라고 하자 등지가 대답했다.

“ 조운이 후방을 끊어 엄호한 뒤 군수물자를 소홀히 버리지 않았기에, 병사와 장수들도 서로 힘을 합해 나뉘어지지 않고 두루 따르게 된 것입니다. ”

당시 조운의 군수물자에 명주가 많이 남아있자, 제갈량은 이를 장사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이에 조운이 나서며 말했다.

“ 군대의 일이란 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누어 주려 하십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을 모두 적안부의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이 오는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하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제갈량은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따랐다.


9. 후주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 조운은 지난 날 선제를 따라 세운 공적이 뚜렷하다.  짐이 어렸을 때, 조운은 위태로움을 무릎쓴 채 충성스런 마음으로 짐을 위험에서 구해냈다.  이에 시호를 내려 그의 뛰어난 공을 추서하려 하니, 밖에서는 조운의 시호에 대해 논의함이 옳을 것이다. ”

이에 대장군 강유 등이 논의하였다.

“ 조운은 지난 날 선제를 따를 때의 노고와 공적이 두드러졌고,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 법도를 받들어 좆았으니 그 공효는 기록에 남길 만 하다.  특히 당양에서의 싸움은 금석을 꿰뚫을만 하여 충성으로 임금을 지켰다.  임금이 그것을 생각하메 후한 예로써 신하를 기리니 신하는 그 죽음을 잊는도다.  죽은 자가 이것을 안다면 족히 썩지 않겠고, 살아있는 자는 은혜에 감동하여 몸을 던져 죽으려 하겠도다.  삼가 시호법을 살펴보니, 유하고 어질며 자애롭고 은혜로움을 일컬어 ‘순’ 이라고 하고, 일을 행함에 나눔이 있는 것을 ‘평’ 이라 하며, 어지러운 화를 극복하는 것 역시 ‘평’ 이라 한다고 했으니, 조운의 시호는 '순평후’라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읽어보신 소감은 어떠신지??

정말 이런 완벽한 사람이 삼국지에 있었던가?

삼국지의 영웅들 대부분은 거의 결점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조운은 도저히 결점을 찾아볼래야 볼수가 없다.

(혹시 조운이 실수를 했거나 잘못한 기록이 있다면 제보바람)

수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상산 조자룡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정말 세상에서

어느누구에게나 비난받은 없이 인정받고 잘살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출처 http://cafe.daum.net/ilovenba/34Xk/102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