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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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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 꽃피운 3인의 스토리

김민섭 [Dr. rafael] 2010. 11. 17. 08:35

 

 

 

 

절망에서 희망 꽃피운 3인의 스토리

경기 회복의 조짐이 보이고는 있지만 극심한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장사하던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강도 절도범으로 전락하고 있다. 희미한 희망을 기다리기보다 절망의 끈을 놓으려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IMF도 경험한 우리지만 삶은 언제나 팍팍하다. 잘나가는 기업인에서 한순간, 신용불량자로 노숙자로 실패자로 추락한 강신기 황병일 유석호 씨.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자살마저 결심했던 이들은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긴 이르지만)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놓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희망이다. 절망보다 희망을 택한 3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바퀴 스케이트 보드인 에스보드 제조회사 데코리의 강신기 사장. 그는 작년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회사의 제품인 ‘에스보드’는 세계적인 발명 전시회를 휩쓸고, 수 백 억원의 로열티 계약을 따냈다.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그는 그러나 노숙자 출신 사장으로 더 유명하다. 강 사장은 지금도 지난 2000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 서울역 지하차도를 잊지 못한다. 광맥을 찾아 탄맥을 뚫던 광부들이 도달해간 갱도의 마지막 자리 같은 곳. 이 곳에서 노숙자 생활을 한 그는, 절망과 더불어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서울역은 노숙자들에게는 인생 막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퀭한 눈동자에 추레한 옷차림의 인생 패배자들. 깎지 않은 머리칼과 수염으로 얼굴이 덥수룩한 그들 가운데는 겨울을 넘기고 나면 사라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
그가 서울역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그가 운영하던 침대 유통 회사가 문을 닫은데 따른 것이다. 집도 경매로 넘어가 버려 아내는 충주에 있는 친정집으로 내려가야 했다. 빈털터리가 돼 버린 그에게, 15년 동안 연락이 없던 아버지가 말기암 환자가 돼 나타난 것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부도를 맞기는 했지만, 당시 재기를 위한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아버지가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보름 만에 돌아가시자,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았습니다.”
병든 아버지를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했다는 자책이 내내 그를 괴롭혔다. 한숨을 쉬고 술에 의지하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맨 정신일 때도 고시원이나 사우나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나 하나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몸을 지탱해 나갔습니다.”
엄혹한 세월을 견뎌내던 그는, ‘물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한 노숙자의 선행을 지켜보면서 재기의 희망을 다지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매일 밤 서울역을 돌면서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물이 담긴 물병을 나눠 주며 강 사장의 주의를 끌었다. “노숙자 신분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사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물영감은 달랐습니다. 따듯한 인정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됐고, 제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신문을 정독하고, 아이디어를 찾아 거리를 헤맨 것도 이 때부터다. 아이들이 타고 노는 ‘킥보드’를 보게 된 것은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구름판을 교대로 밟아 몸을 흔들어 앞으로 나가는 히트상품 ‘에스보드’는 킥보드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하게 된 것.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육신이 고달플 때마다 멋지게 재기한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포기는 김치담글 때나 쓰는 말입니다.” 희망전도사가 전하는 메시지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강신기 사장
■ 1960년 충남 부여 출생 / 80년 천안공고 기계과 졸업/ 94년 황토아랫목 사장/ 현재 데코리 대표이사

신용불량 벗고 재기한 황병일 트윈세이버 사장
“호기심마저 없었다면 지금도 신불자였을 겁니다”

셋집을 줄여 이사 가던 날, 그는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부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는 화장실 가려면 거실을 지나야 했잖아. 이젠 안 그래도 된단다. 방문 열면 바로 화장실이니까. 너희도 좋지?”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때문에 속으로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황병일 트윈세이버 사장은 1983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졸 사원으로 삼성그룹에 입사하고 대학생활을 병행했다. 그러다 8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통신 판매 회사 (주)트윈인더스트리를 설립했다. 10평짜리 사무실에서 시작한 회사를 5년 후 연 매출 2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시켰으나, IMF 외환 위기 때 연쇄 부도로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그러던 중 2001년 6월 경 정부에서 신용불량자 구제 대책을 발표했다. 한 달 안에 밀린 채무를 갚으면 불량 거래자 정보를 모두 삭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갚아야 할 돈이 현금으로 3억원, 만기 연장도 같은 금액이었다.
그냥 기다려 보라는 주위 만류도 있었지만 황 사장은 신용을 살리고 싶었다. 돈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를 알아보던 거래은행 후배, 지인들이 빌려주고 보증을 서 주어 해결했다. 그래서 황병일 사장은 신용불량자의 딱지를 떼고 이름을 찾게 됐다. 이듬 해 1월 트윈세이버의 정식 대표로 취임했다.
황 사장은 학벌, 돈, 집안 중 어느 하나 좋은 백(background)도 없었다. 호기심뿐이었다. 단돈 45만원을 들고 사업 구상 차 떠난 일본행 비행기 안. 한 잡지에서 메모리 폼과 관련된 소재가 실린 것을 보고 새로운 사업에 눈을 뜨게 된다.


어렵사리 돈을 모아 창업했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모든 게 행운이었다. 2001년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엄청난 재앙이 될뻔 한 사고가 보안회사 직원 덕분에 피해가 최소화됐다. 애타게 기다렸던 첫 국제전시회는 준비소홀로 참가조차 못할 상황. 우연히도 불참업체가 생겨 베개 수출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 어렵사리 찾아 마련했던 공장부지가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좌절할 때 기막히게도 인근에 세계적인 LCD공장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물단지가 한순간 회사의 중요자산으로 바뀐 것이다. 황 사장은 이를계기로 누구에게나 한평생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을 믿게 됐다. “물론 그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그 만한 노력과 의지가 따라야 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갈구한다는 것이고, 그럴 때 찾아온 행운이야말로 진정으로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
트윈세이버는 기능성 침구류를 주력품목으로 일본 미국 중국 등 16개국에 100여 곳 이상의 바이어와 거래 중이며 1000만불 수출탑 수상을 포함, 연 매출 170억원의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경호 기자(stanlee@ermedia.net)

황병일 사장
1964년 출생/ 상업고 졸업/ 삼성그룹 입사/ 단국대 경영학과 졸업/ 88년 트윈인더스트리설립/ 98년 부도/ 99년 트윈세이버 설립, 현재 대표이사 사장

신체 포 기 각서만 4번 쓴 유석호 쇼테크 사장
“ 각서 아닌 심장에 도장찍는 맘으로 올인했 죠 ”

처기업 사장, 유서 남기고 한강서 투신 -자살을 해도 보장되는 생명보험에 이미 가입한 것으로 드러나. 한강에서 투신한 남자의 신원은 벤처사업가로 (중략) 유석호(35)씨 는 100억에 가까운 투자유치…자금난…최후의 선택…’
신문 사회면에 등장한 기사가 아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수중에 한 푼도 남지 않았을 때. 자살이라도 해서 가족들 생계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유석호 사장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스스로 작성한 자살 기사이다. 대학 졸업 후 도미(渡美), 테니스 강사로 활동하던 그는 한:중수교를 계기로 여행업, 보따리 무역업으로 돈을 만졌다. 국내에 들어와 벌인 테니스 라켓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물결라켓 웨이브엑스(wavex)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국내 1위의 라켓브랜드가 됐다.(실은 당시 1위, 2위 업체가 연쇄로 부도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 결과였다)
1997년 말 웨이브엑스의 인기 여세를 몰아 98년 봄 시장에 내놓을 제품을 대량 중국에 주문해 놓았다. IMF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환차손이 발생했다. 다시 미국으로 향한 비행기 안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IMF 이후 IT가 부상했고 지역정보사이트와 현재의 쇼링크, 마이링커 원조 격인 소프트웨어 팝쇼도 팔았다. 투자제의가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100억원에 달하는 돈이 들어왔다. 그는 “갑자기 엄청난 돈 폭풍 앞에서 정신을 잃고 정신병자처럼 방만한 경영을 했다”고 고백한다. 1년 만에 투자자금을 소진하고 신체포기 각서를 네 번이나 써야 할 만큼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자살 결심을 한 것도 이 때였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했다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못 졌다고 목숨을 내던질 사람은 아니었다.
유 사장은 “죽음을 생각했고 신체포기 각서까지 썼지만 그 모든 것이 성공으로 향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에, 만약 나의 성공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면 기꺼이 죽을 작정이었죠. 정상과 바닥을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눈물 콧물 짜내며 살진 않았습니다”고 말한다.
목숨을 건 처절한 노력 끝에 2004년 초 드디어 제품이 출시됐다. 마이링커는 며칠 만에 300만대의 컴퓨터에 설치됐고 6개월만에 1000만대를 넘어섰다. 2005년에는 국내에서 100억원 이상, 해외에선 그이상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유 사장은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의 일들이 결코 실패도 성공도 아니고 단지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저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만약 최종 목표가 돈이었다면 지난 3년간 어디 쯤에서 포기했을 거에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그러나 결코 뒤로 가지는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경호 기자(stanlee@ermedia.net)

유석호 사장
■ 1968년 서울 출생/ 87년 중동고 졸업/ 91년 수원대 유전공학과 졸업/ 미 사우스베일러대학, 중국 베이징 중의대 중의학과/ 95~98년 웨이브엑스 경영/ 99년 쇼테크 설립/ 99~2000년 100억원 투자 유치/ 2003년 마이링커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