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질투와 선망 ................ 마광수 본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극의 흥미는 <연민>과 <공포>를 통해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그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고통>을 꼽았다. 관객은 극중의 인물이 겪고 있는 심신의 고통을 보면서 연민을 느낌과 동시에, 그러한 고통이나 재난이 혹시 자기에게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어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연극이나 영화 또는 소설 등의 장르에서, 연민과 공포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질투>와 <선망(羨望)>이라고 생각한다. 연민과 공포도 물론 중요하지만,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겐 질투와 선망의 감정이 더욱 크게 관극심리(觀劇心理)로 작용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는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의 계급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미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평민이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특별한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좀 곤란했을 것 같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어쨌든 겉으로는 계급의 구별이 없는 평등사회이기 때문에, 질투심과 선망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영국이나 스웨덴 등 입헌군주국의 정치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보다 더 안정되어 있는 것도 위와 같은 논리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최고통치자가 이미 결정되어져 있으므로 그 사람에게 질투와 선망을 느끼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누구나 다 넘볼 수 있는 자리이므로 강렬한 질투의 대상이 되어, 여간 정치적 선진국이 아닌 한 언제나 정세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볼 때, 우선 질투와 선망의 심리로부터 흥미와 관심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영화의 경우엔 그래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무조건 잘생기고 봐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들에게 강렬한 질투심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명작영화나 소설이라는 것들이 대개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의 죽음이나 몰락이 우리의 질투심을 진정시켜 주어 통쾌한 감정(카타르시스)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 경우는, 비비안 리 주연의 <애수(哀愁)>를 보면서였다. 비비안 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상대역으로 나온 로버트 테일러 역시 지독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 테일러한테 미칠 듯한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그가 미남이라서기보다도 비비안 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비비안리가 자살해 버리자 그 질투심이 조금 안정되면서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 말고도 질투심을 촉발시키는 요인은 돈, 권력, 명예 등 얼마든지 많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대개 <영웅의 몰락>을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그때도 관객들은 요즘만은 못하지만 역시 연민과 공포보다는 질투와 선망을 느꼈을 것 같다.
영웅의 몰락과 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안도감은 절대로 <극중(劇中)의 비극속으로 감정이 이입(移入)되었다가 연극이 끝난 뒤에 그 이입 상태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얻어지는 안도감> 따위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양심상 꺼림칙한 질투심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부질없는 선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질투와 선망은 조금 다르다. 선망은 단지 부러워하다가 끝나거나, 그 선망의 심리가 바탕이 되어 자기의 신분상승욕구가 긍정적으로 실현되는 데 기틀이 되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질투는 반드시 새디스틱한 복수나 중상모략 등으로 발전하여 상대방도 해칠 뿐더러 자기 자신도 해친다.
선망으로만 끝나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데, 사람의 심리는 미묘해서 대개는 선망이 질투로 발전하게 되거나 선망과 질투의 사이에서 오락가락거리게 되니 탈이다. 대부분의 인간고뇌는 이 <선망과 질투 사이에서의 방황>이 원인이 되는 수가 많은 것 같다.
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질투심이야말로 행복을 방해하는 첫째가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서양인인 리처드 러트 신부는 한국인의 심성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질투심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세나 노사분규 등의 근본적 해결책 역시 <질투심의 억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걷잡을 수 없이 치달려 나가는 질투심을 건강한 선망의 심리 쪽으로 되돌려놓을 때,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도 안정되고 또 우리들 개개인의 행복도 보장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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