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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나의20년 24, 프로필 요약과 앞으로의 포부 본문

Welcome to green life/ + 네!! 저는..요?

나의20년 24, 프로필 요약과 앞으로의 포부

김민섭 [Dr. rafael] 2011. 8. 7. 22:00

대학 4학년 가을때 모습입니다. 얼굴에 몇 개의 점이 보이지요.

서울대 다녔던 친구가 등에 박힌 점들을 보고는 안 중근 닮았다고 추켜 세웠던 점입니다.

지금도 점 빼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때보단 훨씬 부드러워 졌다고들 하네요.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했더니

겸손함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미국 뉴욕대 부속병원 재활센터 벽에 걸려있는 글에서

 

 

 

 

 

 

안녕하세요. 의학박사 김 민섭 입니다.

 

현재 직업은 비공개, 사는 곳은 용인시 죽전竹田 신도시,

세례명(라파엘 대천사)을 빌어 닥터 라파엘(라파엘 박사)이라고도 하며

초록을 좋아하여 블로그 필명으로 Dr.초록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았습니다.

그땐 미술, 음악 등 예능에도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전 남달리 붓글씨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소풍을 갈 때마다 점심 시간에 이어서 보물찾기와 그리기 대회가

열리곤 했었는데 저는 보물찾기보다 그리기에 더 열중해서
매번 특선으로 입상하고 했으니까요.
물론 교실 뒷편엔 언제나 제가 쓴 서예나 만들기 작품들도 게시되었었구요
피리나 노래도 악보를 보며 잘 따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 공부에 열중해야 했지요.
그래서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부터 전체 수석에 이르더니 한 번 잡은 그 수석을
졸업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땐 대단했던 것 같아요.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전과목 평균 98.3점(음악 실기 성적까지 포함된 것)까지 나왔었고,

체육에서 치명적인 65점을 맞았어도 졸업할 때까지 전교 수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는게...
물론 대학 학부 1학년과 석사, 박사 과정에서도 전과목 All A+(95~100점)를 받기도 했었지만
그때만큼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전교 수석 졸업을 기념하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래서 당시 상업 선생님은 수업할 때마다 '김박사 대답해봐요' 라고 했었고,
영어 선생님이셨던 담임 선생님은 의학박사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크나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준 일들도 있었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과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가장 불행했던 일은

유년시절의 질병과 그로 인한 후유증이었습니다.

약 5세 정도되는 때였는데 고열로 알아 눕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걷는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서울의 한의원을 찾아 백방으로 고치려 했으나 완치되지 못하고
불편한 다리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과정들도 있었습니다.
초등 4,5,6학년 때는 방과 후 운동장에 남아 태권도로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고,
중학교 때는 다리 교정을 하기 위하여 보조기(철심으로 된 것)을 착용,

걸을 때마다 복숭아 뼈가 까져서 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직장인이 된 후에는

두 차례나 수술로서 뼈와 인대 등의 교정을 결행하여
각각 3개월 이상의 기브스 착용과 힘겨운 재활 과정을 견뎌야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훨씬 반듯하게 걷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교정하려고 수술하고 회복중일 때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이 휄체어 나들이더라구요.

 

 

두번째로 불행했던 일은

대학 입시에서의 불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 남부의 명문고 P고교에 진학하여 대학 입시 공부에 열중해야 했지만
도시 유학으로 흩어져서 공부하고 있던 네 형제가 자취/하숙비를 아끼기 위해

중간 지점인 수원에 모이게 되었고 저는 평택까지 기차와 버스 통학을 해야 했는데

대입, 고3 수험생이 피로 누적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긴 어려웠습니다.

물론 수원시내로의 전입학도 시도했었지만 추첨 학교가 바라던 곳이 아니었고

실업 및 외국어 교과목까지 평고와 달라서 전학을 포기해야 했었기에

더욱 아쉬움은 컸습니다.

 

그래서, 가정 형편을 고려

S대 약대에 장학생 입학을 목표로 지원했으나
수혜 대상이 많아져 등록을 포기하고 재수의 길을 택했습니다.

위로도 삼형제가 있어 농촌 실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자연계 장학생은 되는 성적이었거든요.

재수와 삼수 때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예상 커트라인을 웃돌아

접수 첫날부터 일찌감치 원서를 접수하였으나 또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될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겐 운이 안따라 주더군요.

 

중학교때 전교 차석으로 졸업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중 하나인 J군은

아버지의 권유로 S대 철학과 대신 K대 법학과에 들어가기도 했었는데

첫 해 합격한 학과에 등록을 포기한 것이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이 때에는 전기와 후기 한 대학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후기에는 도전해볼 만한 대학이 없었으니까요.

 

그 절망의 벼랑끝에서 선택했던 건

고향 수원에 국내 최초로 개설한 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것 그래서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형님의 지원과 아르바이트로 해결할 수 있었고
졸업시에는 시카고 주립대 대학원 유학 장학생에 선발되는 동시에
대기업 기술연구소에 합격되는 영광까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태평양(현, Amore-Pacific) 생화학사업부문에 있으면서
S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대학원 졸업 사진입니다.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동 대학 동 학과에서 공부한 동기들 중에는

취업하지 않고 석,박사 과정을 계속하여 미국 Cornel대,

K대 등에서 교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건 제 생애 세번째로 장만한 용인시 죽전지구(신도시)의 아파트입니다.

 

세 개의 대학과 두 개의 전공학과를 거쳐 의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의학박사 학위 취득은 (강남)CHA병원

벤처회사(CHA Biomed) 실무 책임자로 입사하게 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차병원의 벤처 사업을 주도하면서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CHA의과대학 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입학한지 불과 3학기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직중인 회사의 연구소나 대학의 초빙 강사의 직무를 있었기 때문애

의학 박사 논문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출강과 연구소를 그만두고 논문 연구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대학 4학년 겨울에 생명공학 연구원으로서 사회에 나와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하고

대학원에 들어가 이학석사와 의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었던 건
일하면서 배우는 땀방울의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원 박사 과정를 졸업한 CHA Medical University 전경입니다.

 

마이카는 렉스턴(REXTON NOBLESSE?)입니다.

차는 저의 소중한 이동 수단입니다.

 

 

웨건형 SUV인데 저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구요.
누군가 그 차를 타보고는 저에게 '만능 차(?)'라 하더라구요.
CF 카피처럼 그 차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음... 그러고 보니 저에게 차(CHA)는 정말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먹는 차/다니던 회사는 커피. 녹차(태평양에서 나오는 설록차)
달리는 차/소유했던 차는 프라이드, 엘란트라, 스포티지, EF소나타,
YF쏘나타(YD에서 제공했던 차), 렉스턴(현재 차) 였구요.
배우는 차/다녔던 대학은 CHA의과대학교(의학박사)
근무했던 차/연구했던 곳도 CHA바이오(연구소장/본부장) 그리고
CHA의과대학 부속 CHA병원 대체의학연구소(객원전문연구위원) 등 이었죠.
이렇게 나열해보니 그럴싸 해 보입니다.

 

'차'가 이보다 더 특별할 순 없겠죠! 물론 '차'와 관련해서 엮어 본 것입니다.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넓습니다.

보다 큰 세계를 향해 포부를 펼치고자 합니다.

 

여기서 지난 일들을 얘기하다보니까
어디선가 '아~ 꿈에도 잊지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많고 설움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는

노래 가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괜히 지난 과거를 소개했나 싶습니다.
그냥 '의학박사 김민섭입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또한 인생을 되돌아 보기엔 아직도 젊고 할 일이 많은데...

그래서 앞으로 이뤄내야 하는, 결국 이뤄냈다고 하는 일들로
이 블로그를 채울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서 추구한 바가 있다면
태어나서 박사가 되기 전까진 '김무섭'이라 불린 것처럼

무섭의 '무'가 호반 무, 굳셀 武이듯 꿋꿋히 살아 온 것 같구요
박사가 된 이후에는 '김민섭'이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2006년부터인가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개명한 것이지만
민섭의 '민'이 글월 文자와 날 日자가 합쳐져서 온화할 旼자가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였고요

기왕이면 앞으로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름은 개명했어도

이름 석자 한글 초성 'ㄱㅁㅅ' 은 그대로인 것처럼,
어릴적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어색하지 않게 '무섭(武燮)'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함께 사는 '우리'로서 '민섭(旼燮)'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2009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