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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대화 제의의 진정성 vs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어리석음
김민섭 [Dr. rafael] 2014. 11. 5. 12:11
오늘자 신문을 보건데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라늄 농축과 소형화 기폭장치 실험을 계속하고 있고,
방사포 등 화력 보강과 개량한 잠수함 등 다양한 운반체에 탑재가 가능한 핵탄두? 미사일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북한 지도부의 의도가 아니라 "능력"임을 알고
대화는 하되 다양한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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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 있다. 노처녀에게 “시집 언제 가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다. 바로 “전쟁이 나겠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꼭 이런 질문이 나온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그랬고,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있었다.
이럴 때면 이른바 ‘국방 전문가’라고 하는 인사들이 언론매체에 등장해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피력한다. 이들은 대체로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군사전략적으로 ‘위협’(威脅)을 평가하는 요소는 세 가지다. 의도(意圖), 능력(能力), 환경(環境)·조건(條件)이다. 첫째는 상대국이 전쟁을 하려는 의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뒷받침되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국내외적 환경이나 조건이 성숙돼 있느냐는 것이다.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 ‘능력’이다. 의도와 환경·조건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보다 덜 중요한 요소다. 능력은 위협의 주체다. 능력만 확실하게 갖춰져 있다면 언제든지 전쟁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보라. 전쟁을 하느니 마느니 일본 군부와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전쟁을 일으켰다. 왜 전쟁이 가능했는가? 의도와 환경보다 전쟁을 수행할 ‘능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을 보라.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를 다 끝냈다. 그리고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의도를 타진해 동의를 얻었고(의도 충족), 남한에 혼란이 조성되자(환경과 조건 충족)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북한군은 사단급 부대의 훈련까지 마친 19만8380명의 병력과 소련제 T-34전차 242대, 그리고 고성능 전투기 YAK-9를 비롯한 210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반면 국군은 대대급 훈련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10만5752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전차는 물론 대전차 무기조차 제대로 없었다. 김일성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상태라면 전쟁을 할 만했을 것이다. ‘능력’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 의도나 조건보다는 그들의 실제적 ‘전쟁능력’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그 어떤 예측이나 전략도 헛다리를 짚는 게 되고 만다.
전쟁 의도·환경보다 중요한 건 전쟁 능력
손자병법 구변(九變) 제8편에 보면 이와 관련된 중요한 어구가 나온다. 손자병법 전체를 통해 방어 태세를 강조한 어구는 오직 이 하나뿐이다. “적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지 말고, 나에게 적이 올 것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음을 믿어야 하며, 적이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바람을 믿지 말고, 나에게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 無恃其不攻 恃吾有所不可攻也)”
그야말로 금언(金言)이 아닐 수 없다. 적의 의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공격해 올 것인지, 공격해 오지 않을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오직 적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게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능력’ 즉 ‘준비태세’를 갖추는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과연 감탄할 만한 무성(武聖)의 통찰력이다. ‘능력’이 뒷받침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은 그래서 중요하다.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에 나오는 이 말은 ‘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중국의 병법서인 사마법(司馬法)에는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구절이 있다. ‘천하가 비록 편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해진다’는 뜻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조선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200여 년의 태평세월에 길들여진 조선의 지도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노골적 침략 의도를 애써 모른 척했다. 마치 쫓기던 꿩이 땅에 머리를 꼬라박고 잠시 포수의 총구를 잊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정사 황윤길(黃允吉)이 일본의 전쟁 의도를 알아차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말에 손을 들어주었다.
당파 싸움을 중심으로 한 그 내막은 여기서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591년 3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전쟁을 준비했더라면 그렇게 참혹한 전란(戰亂)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은 돌았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폐지론(水軍廢址論)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해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민활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수군폐지론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립(申砬) 장군까지 합세해 그 기세가 대단했다. 자칫 수군이 없어질 판이었다. 바로 이때 이순신 장군이 혜성(彗星)같이 등장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일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즉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된 이순신 장군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해적을 막는 데는 해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절대로 폐해서는 안 됩니다.”(선묘중흥지)
유비무환! 백 마디의 말이 소용없다. 실제로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위기 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일본의 침략을 그저 소문으로만 듣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순신의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적의 의도가 어떻든지 확실한 ‘능력’을 키우려 한 것이다.
예하 5관(官) 5포(浦)에 대한 초도 순시를 시작으로 전투 준비태세를 점검했다.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체계를 정비했다.
이순신, 활쏘기 명중률 84% 기록
임진년 정월 16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이때 얼마나 전투준비에 신경을 곤두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 “……방답(防踏)의 병선(兵船)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虞候·절도사에게 속한 무관)와 가수(假守·임시직 관리)도 역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이 짐작할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랍시고 선생원(先生院)에서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전투 준비를 소홀히 한 책임자는 용서 없이 처벌했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민폐를 끼친 자도 반드시 처벌을 했다는 것이다.
2월 25일자 일기에도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3월 4일자 일기에도 “서문 밖에 해자 구덩이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점검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했기에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속세를 떠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전쟁준비에 소홀히 하면 가차 없었다.
이순신의 관심은 온통 전쟁준비였다. 그 외의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대 전체의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했지만 그 자신도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전체에서 이순신이 활쏘기를 한 기록은 대략 270여 회나 나온다. 병중(病中)이거나 제사 또는 나라의 특별한 일 외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활을 쐈다는 얘기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의 일기를 보면 집중적으로 활을 쏘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술자리를 하면서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3월 16일자 일기를 보면 이렇다. “순천부사가 환선정(喚仙亭)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과연 프로답다. 참고로 이순신의 활 솜씨를 잠시 엿보자.
3월 28일자 일기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활 10순(巡)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연달아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十巡卽 五巡連中 二巡四中 三巡三中).”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풀어보자. 1순은 5발(矢)이다.
처음 다섯 순은 모두 맞혔으니 25발 명중이다. 이를 몰기(沒技)라 부른다. 2순은 각각 4발을 맞혔으니 총 8발 명중이다. 3순은 각각 3발을 맞혔으니 총 9발 명중이다. 이를 합하면 25+8+9=42가 된다. 즉 50발 중 42발이 명중된 것이니 84%의 명중률이다. 이 정도의 실력이면 현재 대한궁도협회에서 정한 8단의 기준인 82%를 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전쟁 준비 가운데 압권(壓卷)은 거북선의 건조다.
물론 거북선은 이순신의 창작품은 아니다. 이미 170년 전의 태종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태종 당시의 ‘위협용 거북선’을 개량해 총포를 최대한 장착한 ‘전투용 거북선’으로 새롭게 건조했다.
4월 12일자 일기를 보자.
“식사 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8700명의 일본군을 동원해 조선 땅을 침략했다.
손자는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쓸데없이 전쟁이 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탁상공론하지 말라.
그 대신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확실한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나라가 어수선할수록 본질에 충실하도록 하라.
기업인은 품질 좋은 상품을 개발하는 데 목숨을 걸어라.
정치인은 주변국을 돌아보고 미래지향적 전략 마인드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이 잘살게 하는 길에 목숨을 걸어라.
군인은 적이 감히 넘보지 못할 위협적이고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는 데 목숨을 걸어라.
이순신 장군이 행동으로 보여준 유비무환, 구국의 정신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9> 이순신과 위기관리 리더십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7&num=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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