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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5호선] 지하철 테마여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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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5호선] 지하철 테마여행

김민섭 [Dr. rafael] 2011. 1. 10. 17:55

 

 

 

 5호선역사명소 


 


 방이백제고분군

 

 3번 출구로 나가서 200m쯤 가면 오른쪽으로 길이 꺾어진다. 그 길을 따라 쭉 300m정도 가면 오른쪽에 방이백제고분군 출입구가 나온다.

 

흔히들 백제의 수도 하면 공주, 부여를 떠올리지만, 사실 600여 년간의 백제 역사에서 공주, 부여가 수도였던 건 후기의 200년 정도다. 그 전 400여년은 위례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그렇담 위례성이 어드메냐, 그것은 알수 없다. 현재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자리, 그리고 이곳 방이동백제고분군 부근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란다. 신라가 백제를 점령하면서 백제의 기록문서들을 다 없애버려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역시, 역사는 승자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


 


 

이곳은 백제시대의 고분 10개 호가 있었다고 추측되는 자리에 8개 호를 복원시켜놓은 사적이다. 백제 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그저 밋밋한 무덤 여덟개 짜리 공원일 뿐인 이곳을, 멋진 역사 유적지로 탈바꿈 시켜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유적해설사 할아버지다. 

 

토, 일, 화, 수요일에 가면 노란조끼를 입은 할아버지의 친절하고 자세하고 재밌기까지 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백제의 역사, 백제와 주변국과의 관계 등 유창하게 이어지는 해설사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다보면 정말 역사적 중요 유적지에 서있는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그저 역사적 사실만을 늘어놓는 건조한 해설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과 행간을 읽어주시는 것이, 마치 어릴 적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 듣던 느낌이다.


 

동네 뒷산의 주인 모를 무덤이나 백제고분군의 무덤이나 죽은 사람 누워있는 자리라는 건 같지만 단순한 시각으로 이 고분군을 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 고분군은 백제시대 왕족 혹은 귀족의 묘일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상과 미술, 공예 수준이 어땠는지, 더 나아가 고분이 만들어진 형태 등에 의해 그 시대 건축기술까지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인지해야 할 것이 있다. 이곳은 공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조깅이나 좀 해야지, 아침운동 해야지 하고 들락거릴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앉아서 쉴 수 있고 산책 정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백제의 후손답게, 시민정신 발휘해서 기본적 예의는 지키자.

 

(해설사 할아버지 추천 - 가까운 곳에 또 다른 백제고분군이 있다. 바로 석촌동 백제고분군. 관리가 잘 돼 있어 백제시대를 들여다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8호선 석촌역 6번 출구 석촌초등학교 부근)

 

 이런 사람 꼭 가라 !!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

 백제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곤 성유리 나온 드라마‘천년지애’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것 밖에 모르는 사람

 


 


 풍납토성

 

 10번 출구 나와서 30m 정도 앞에 바로 나온다.

 

정식 명칭은 ‘광주 풍납리 토성’이다. 이곳이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광주시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방이백제고분군과 같이 백제시대를 연구하는 중요 자료다. 여기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걸로 미뤄보아 토성이 만들어진 건 백제시대이지만 이 지역에 사람이 산 건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 오래 전부터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천호동 일대의 풍납토성 흔적


 

문화재 연구에도 돈이 필요하다. 당연한 명제인데, 이 명제가 안타깝게 들린다. 풍납토성 주변지역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땅을 깊이 팠는데 백제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재개발은 중단됐다. 당연한진 모르겠지만, 지역 주민들은 계속 재개발을 이어가라며 3년간 데모를 했고 결국 문화재청에서 얼마의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지역이 백제사 연구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마당에 당연한 결과다.

 

안타까운 이유는 그 다음부터다. 제대로 연구를 하려면 3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돼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단 거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진퇴양난의 상황이 이런 건가보다.


 

사실 길가에 얕고 자그마한 언덕처럼 서있는 이 토성 하나만을 위해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는 건 역사학도, 학자, 백제의 직계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쉬운 일은 아닐 게다. 방이백제고분군, 석촌고분군 등 주변의 다른 곳과 연계해서 방문하는 게 좋을듯하다. 한강시민공원 광나루지구 나들이 길에 잠깐 들르는 것도 좋은 루트다.

 

 이런 사람 꼭 가라 !!

 

 방이백제고분군에 들렀다가 백제 역사에 대해 ‘삘’받은 사람

 지지부진한 문화재연구의 현장에서 안타까움을 깊이 느껴볼 사람

 역사학도, 학자, 자신이 백제의 직계후손인 것만 같은 사람

 

 


 탑골공원

 

 5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2차선 도로가 있다. 그 길을 건너서 왼쪽으로 꺾어 대로가 나올 때까지 걷는다. 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걸어가면 탑골공원 정문이다.

 


유리벽에 보관된 원각사지십층석탑

 

언젠가부터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은 ‘할아버지들 많은 공원’으로 각인돼 버렸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나치기엔 아쉬운 게 참 많은 역사적 장소이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흥복사의 옛터에 조선 세조 때 세운 원각사가 있던 자리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유리벽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라는 타이틀과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갖고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팔각정도 단순한 팔각정이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주소로 사용된 전적이 있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 팔각정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팔각정

 

국보에 보물(대원각사비), 서울시 유형문화재까지 들어서 있고 사적으로 지정된 공원, 무게 잡아야 할 곳으로 느껴지는가?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하면 사실 그렇다. 근데 아니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온전히 느끼며 되새길 수 있고, 또 한편으론 쉬고 노닥거릴 수 있는 공원이다.


 


3.1운동 기념부조가 이어진 길

 

할아버지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있어 참 다행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휴식처가 되기에도 부족함 없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한 번 만들어보자. 만세!!!

 

 이런 사람 꼭 가라 !!

 

 

 서울에 있는 국보와 보물은 남대문, 동대문밖에 모르는 사람

 삼일절을 전후로 종로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

 종로의 번화가만 찾아다닌 젊은 연인들

 

 

 창덕궁

 

 6번 출구로 나와서 획 뒤돌아서 왼쪽으로 꺾어 약 8분간 계속 직진한다. 길 끝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창덕궁 정문이다.

 


창덕궁의 입구 '돈화문'

 

창덕궁에 관한 기본적 사실들을 짚어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궁궐. 1405년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 임진왜란 이후엔 경복궁 대신해 약 270년간 왕조의 중심 궁궐로 이용된 곳. 가장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됐으며 가장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 궁궐.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힘을 내뿜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아무때나 아무렇게나, 티켓만 산다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시 15분, 45분에 출발해 약 1시간 20분 동안 창덕궁 해설사의 안내와 함께 관람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워낙 넓은 궁궐 내를 아름답고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면 수긍할 수 있을 게다. 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설사 분의 재밌고 유창한 안내를 듣다보면 더 많은 것을 깊이 볼 수 있게 된다.


무게가 느껴지는 인정전

 

돈화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본격적인 궁의 모습이 시작된다. 보통 궁이 문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나타나는 것과 다르다. 이유는 지형적인 면을 고려해 자연을 크게 해치치 않는 범위에서 구조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인정전에 들어서면 웅장하고 고즈넉한 한국미를 느끼게 된다. 파란 하늘과 원래 한 쌍이라는 듯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사각형 연못에 원형 섬. 조선 사람들이 생각하는 땅과 하늘의 형상이다.

 

마치 싸움도 한 번 없었을 듯이 평화롭고 우아해 보이는 경내를 거닐다보면, 옛날엔 ‘금원’이라고도 불렸으며 요즘 사람들에겐 ‘비원’이라 자주 불리는 ‘후원’에 다다른다.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많은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사각형 형태의 연못 안에 원형의 작은 섬을 만들어놓은 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적 우주관을 반영한 결과다. 땅의 모양은 사각형이며 하늘은 원형이라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뭔가 느껴지시는가? 저 윤이 나는 파란 기와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거란다.
당시 저 색을 내기 위해서는 비싸게 수입한 재료를 써야 했다고.

 

조선시대를 머리로 상상하고 마음으로 느끼다보면 1시간 20분도 금방이다. 이 즐거운 관람을 모두가 쾌적하게 즐길 수 있으려면 조심 좀 하셔야 할 것들이 있다.

 

담배피지 마시라. 이런 건 기본 아닌가? 도시락 싸와서 먹지 마시라. 음식물 반입 금지다. 식구끼리 돗자리까지 준비해와 해설사 눈 피해가며 먹는 사람들 있단다. 이 경치 좋은 궁궐에서 밥 한 끼 먹고 싶은 마음 누군들 이해 못하랴만 우리 모두의 유산이며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창덕궁, 관람객들이 기본만 지켜도 아름답게 유지될 것 같다.

 

 이런 사람 꼭 가라 !!

 

 

 조선왕조의 기운과 기품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

 한국에 놀러온 외국인 친구의 가이드를 자처한 사람

 서울시내의 복잡함을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사람

 아가손 잡고 나들이 갈 곳을 찾는 부모님


http://www.cdg.go.kr
02-762-0648

 

 운현궁

 

 5번 출구로 나와서 오른쪽 대각선방향 맞은편에 있는 SC제일은행 간판 옆길로 쭉 가다가 오른쪽에 낙원떡집을 지나쳐 천도교 수운회관 맞은편에 운현궁 정문이 있다.

 

 


 

 

한국근대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굴까? 현대사의 박 모 씨만큼이나 그 평가가 엇갈리는 흥선대원군일 게다. 세도정치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정치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공을 세웠지만 경복궁 중건한다고 백성들 허리 휘게 하고 쇄국정책으로 근대적 개혁에 실패해 그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큰 과오를 남겨버렸다.


 


 

운현궁은 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私邸)다.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12세까지 자란 곳인데 이후 왕위에 오르자 운현궁이라는 칭호와 함께 대원군의 거처다운 면모로 확장, 증축됐다. 사저이니만큼 여느 궁궐에 비해 물론 작고 소박하지만 이곳에서 행해졌던 권력의 힘은 대단했다. 국가기구를 통하지 않고 웬만한 국가의 실정을 다 파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운현궁 한 쪽엔 작은 유물전시관이 만들어져 있다. 그 시대의 생활상을 살짜쿵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 모습과 전혀 딴판인 이 시대의 복장이 지금과 아주 먼 얘기 같지만 따지고 보면 약 100여 년 전 모습일 뿐이다. 대한제국이 몰락할 무렵의 시대상은 어쩌면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르지 않나?

 

 이런 사람 꼭 가라 !!

 

 기구하고 구구한 대한제국 흥망의 현장이 궁금한 사람

 한국 역사, 한국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마음에 품은 사람

 한옥만 보면 마음에 편안해지는 사람

 한국에 놀러온 외국인 친구의 가이드를 자처한 사람


http://www.unhyungung.com 
02-766-9090

 

 종묘

 

 8번 출구에서 100m가량 쭉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꺾어 150m정도 가면 종묘공원 입구가 나온다.

 


 

우리가 가진 또 하나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3년(1394) 12월에 착공하여 다음해 9월 완성했다고 한다. 여전히 매년 5월마다 지내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종묘제례악의 본거지이기도 한데, 그 음율의 웅장함이 대단하다고 한다.


종묘의 메인코스, 정전

 

아시다시피 종묘는 산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죽은 자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그래서 종묘는 태조를 비롯한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와 왕비의 신주 30위를 모신 정전과, 정전에서 옮겨진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별묘인 영녕전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외에 제관들이 대기하는 장소인 향대청, 제례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 악공들이 대기하던 악공청등이 있다.


 


 

종묘공원은 나무와 연못이 함께 어우러진 울창함과 아름다움으로 산책코스로 이용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창경궁과 연결 육교가 있어 종묘에 들렀다 창경궁까지 훑을 수 있는 좋은 코스가 된다. 종로에서 종묘로 들어가 창경궁을 통해 혜화동으로 나오는 게 가능하겠다.


다리 건너 만나는 창경궁 내 일부

 

 이런 사람 꼭 가라 !!

 

 조선의 제례문화를 알고 싶은 사람

 조선의 건축적, 문화적 가치를 경험하고픈 사람

 종로3가에서 걸어서 학교로 가려는 성균관대 학생


http://jm.cha.go.kr/
02-765-0195

 


 약현성당(중림동성당)

 

  4번 출구에서 약 200m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쭉 150m 정도 가면 오르막길로 된 성당 초입이 나타난다.

 


 

맑은 날 이곳은 ‘이보다 더 따뜻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물론 이곳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 말이다. 성당의 십자가 첨탑을 올려다보면 화려함으로 뽐내려는 경박함은 전혀 보이지 않고 소박하게 믿음을 지켜가는 신앙인들의 순수함이 전해질 뿐이다.


 


 

지금은 중림동성당이라 불리는 약현성당은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정통의 양식은 아니라지만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지상 1층 건물이다. 1892년의 사람들에게 이런 서양식의 건물은 새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고난의 시기를 맞은 천주교도들이 이 근처에서 순교하여 여기 성당이 세워졌단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비아돌로로사 14처소를 돌로 만들어놓았다.

 

성당 초입에서 언덕길을 따라 빠르게 올라갈 수도 있지만 왼쪽에 나있는 꼬불꼬불한 길로 올라가보라. 예수가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순간부터 무덤에 묻힌 순간까지 열 네 장소를 기념하는 길이 있다. 이는 원래 비아돌로로사(고난의 길)라 불린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선 매주 금요일에 수도사들과 세계 각지의 크리스트교도들이 예수가 사형을 언도받은 자리라는 성안나교회서부터 묻히신 자리라는 성분묘교회까지 긴 행진을 이어가며 예수의 사랑을 기념하고  있다.


 


 

약현성당에 등록된 신도가 아니어도, 카톨릭 교도가 아니어도 따뜻한 봄햇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세상 모든 사람의 집’에 가보고 싶다면 발걸음을 옮겨보자. 마음에 무거운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용한 성당 안에서 절대자 앞에 마음 놓고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사람 꼭 가라 !!

 

 천주교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람

 한국 근대사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은 사람

 보기만 해도 편안한 예쁜 성당에서 천사 같은 수녀님들을 만나고 싶은 사람